=알려지지 않고 잊혀가는 애국지사= “금암 윤만식(琴嵓 尹萬植): (1857~1927)”선생의 호(號)는 금암(琴嵓), 자(字)는 하서(夏瑞)이며, 1857년, 정사년(丁巳年) 8월에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 봉화군(奉化郡) 재산(才山)의 유학자이며, 본관 파평(坡平)의 소정공(昭靖公) 3방(三房), 영천부원군파(鈴川府院君派), 전 부위(副尉) 통정대부(通政大夫)이셨던 휘(諱) 영(泳)의 차자(次子)로, 시조 후 30세손으로 출생, 성장하였으며, 향리 인근, 재산(才山)의 반천서원(盤泉書院), 봉화(奉化)
충효가 출천하고 절의가 빛난다忠孝出天 節義炳日역사인물연구소장 김정찬 외남, 상주의 성에서 보았을 때 남쪽 외지에 있다하여 붙인 이름인 듯 하다. 그 외남에 서산이 있다. 청리 서쪽에 있어서 그런 듯 하다. 버스터미널에서 남쪽으로 계속 가다가 개운동에 이르러 외남방향의 997번 지방도를 따라 외남쪽으로 계속 가다가 외남면 구서보건소 쯤에서 보면 11시 방향에 서산이 보인다. 여기서 약 3분여 거리에, 왼쪽에 서산의 안령(말 안장을 닮은 고개)이 있다. 오른쪽 길가에는 김신의 공덕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상의군의 본산인 외남 안령이
사벌의 인물, 시서화 삼절의 이재 조우인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 국사봉 일대는 이재 조우인이 인조 임금으로부터 매호십리강산梅湖十里江山을 국록國祿으로 받은 지역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곳은 최근 MRF 낙동강 700리 이야기길이 개통되었다. 주변의 볼거리로는 낙동강 700리 시작공원, 퇴강 천주교 성당, 임호정, 조우인 문학비, 어풍대 등이 있다. 공의 이름[휘諱]은 우인友仁이요, 자字는 여익汝益이다. 부친 휘 몽신夢臣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평산 신씨로 1561년에 예천군 노포리蘆浦里에서 공을 낳았
삼백재三白齋 이야기김 정 찬 우리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일컫고 있다. 세 가지 흰 것으로 유명하다는 말이다. 그 세 가지는 바로 누에, 곶감, 쌀을 두고 한 말이다. 그래서 늘상 상주를 외부에 알릴 때 ‘삼백의 고장’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상주가 아닌 곳의 사람들이 상주를 안다고 말할 때는 삼백의 고장이라고 하는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쯤 전의 일이다. 재령강씨 문중에서 삼백재집三白齋集이라는 문집을 얻어 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문집을 볼 때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시와 기문 그리고 행장
옛날 사람들의 낙동강 이야기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경천대에서의 詩會 행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집약해 놓은 자료는 거의 없고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까지 찾아본 자료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는 자료는 ‘上洛唱酬詩集’이다. 이 시집은 경천대와 도남서원에서 박천 이옥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문회를 가진 후 서문을 쓰고 시를 적어 만든 시첩이다. 그 서문을 통해 경천대가 역사적으로 문회의 장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서로 쓴 그 서문의 내용이다. 나[이옥]는 경기도 파주에 3년째 거주하고 있었다. 3년 동안 연
매호별곡의 이재 조우인김정찬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 국사봉 일대는 이재 조우인이 인조 임금으로부터 매호십리강산梅湖十里江山을 국록國祿으로 받은 지역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곳은 MRF 낙동강 700리 이야기길이 개통되었다. 주변의 볼거리로는 낙동강 700리 시작공원, 퇴강 천주교 성당, 임호정, 조우인 문학비, 어풍대 등이 있다. 공은 이름[휘諱]이 우인友仁이요, 자字는 여익汝益이다. 부친 휘 몽신夢臣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평산 신씨로 1561년에 예천군 노포리蘆浦里에서 공을 낳았다. 태어난 지 열흘쯤 지나 모친이 세상을
觀水亭 友愛 우성일김정찬 함창에서 서쪽으로 10리쯤에 장계촌이 있고 이 마을 북쪽에 산이 있다. 이 산은 동쪽으로 뻗어가다가 냇물에 닿아서는 우뚝 섰는데 이름은 ‘기산’이라 한다. 냇물은 남쪽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기산 발치에서 산을 안고 감아 흐르니 이 물이 ‘영수’라고 하는데, 물가에는 한 개의 큰 바위가 있어 물에서 네다섯 자[丈]가 되어 이 바위을 ‘관암’이라 한다. 바위 모양은 둥글넓적하여 100명 정도 앉을 수 있고 바위 위에는 한 채의 정자가 있으니 이 정자가 바로 ‘관수정’이다. 이 정자는 작아서 한 칸의 집일 뿐 방조
재령강씨의 일문사처사(一門四處士)와 대명사처사(大明四處士)김정찬 재령강씨는 지금의 갑장산 자락에 살았다. 공성에서 이쪽으로 옮겨 온 사람은 남계 강응철이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으며 이 일대에서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연악문회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강응철, 이전, 이준, 정경세를 두고 상산사호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아들은 4명인데 이름은 용후(用候), 용량(用良), 용정(用正), 용직(用直)이다. 맏아들인 강용후는 호가 눌헌(訥軒)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행장이나 가장 등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
연악서원...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상주시 근교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한 산이 갑장산이다. 갑장산은 일명 연악산이라 한다. 연악산 아래 수석이 빼어난 곳은 바로 연악구곡이다. 연악구곡의 제2곡인 사군대에 당시 상주목사인 신잠 목사가 서당을 세우고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본인이 직접 연악서당(기록에는 연악서원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이 기록물을 남길 당시, 서당이 서원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이라 글씨를 써서 걸었다 한다. 그 이후로 이곳은 선비들의 유상처가 되었고, 후계 김범이 시를 지어 기념한 뒤로부터 여러 선비들이
상주지역 최초 의병인 상의병 대장 석천 김각 효성이 뛰어났던 상산사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운정 김언건의 아들, 임진왜란 때 외남을 기반으로 한 상주의 의병이라는 의미의 '상의병'. 그 의병의 대장, 15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 초중반까지 상주인물의 르네상스 시대일 때,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던 창석 이준의 스승 이었던 분이 바로 석천 김각이다. 지금도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상황을 기록한 '임진창의록'이 전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한 석천 김각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석천 김공께서는 만력 경술년 1월 26
상산사노, 효자 김언건 옛날에 행실이 독실한 군자 운정(芸亭) 김 선생의 묘가 상주(尙州)의 산천 감좌(坎坐)를 등진 언덕에 있다. 명망있는 자손인 상사(上舍) 김광철(金光澈)이 나에게 “선조의 묘갈명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집안에 일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잘 생각해 주십시오.”라 부탁하였다. 내가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자, 또 말하기를 “그대가 한마디 써 주지 않는다면 선조의 묘에는 영원히 묘갈명이 없게 될 것이니, 훗날 지하에서 선조를 뵐 면목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대가 끝내 잘 도모해 주십시오.” 라 하
善人善政 김홍민 상산김씨이다. 부친은 1500년대 초 상주의 名賢이신 상산사노 가운데 한 분인 후계 김범이다. 김홍민의 호는 사담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의병인 '충보군'을 조직하여 공을 세웠다. 동생인 성극당 김홍미 또한 과거에 급제하여 강릉부사를 지냈다. 2대에 걸쳐 상주에서는 명성을 유지한 집안의 장남이다. 모든 사람들이 善人이라 불렀고 관직생활에서는 善政을 베풀었다. 김홍민金弘敏[1540~1594]은 자가 중원重遠인데 임부任父로 고쳤고 상주사람이다. 6대조는 김상직인데 세종 대에 관직이 집현전
靑華官職 未有食浮 김광엽김 정 찬 김광엽金光燁의 자는 이회而晦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국초國初에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양경공襄景公인 휘 승주承霔의 6대손이다. 고조는 휘가 약균若均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승평군昇平君에 봉해졌으며,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수홍粹洪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다. 조고는
갑장산과 와운[와목] 강용량 김정찬 상주를 대표하는 산은 갑장산이다. 일명 연악산이다. 조선 중기부터 이 일대는 상주를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다. 재령강씨 때문이다. 남계 강응철은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우복 정경세와 더불어 ‘상산사호’로 불리면서, 갑장산 아래 지천 계곡을 ‘연악구곡’이라 명명하고, 그 일대에 연악서원을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한 이후 이곳은 단순히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아닌 학문의 공간과 시회의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남계 강응철의 아들 3명은 모두 벼슬을 하지 않으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인물이라서, 동
소학김씨가서(小學金氏家書) 일묵재 김광두김 정 찬 상산김씨 11세손인 일묵재 김광두는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과 교유하면서 당대를 이끌어간 상주의 지식인이다. 지금의 모동면 송포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묵재 이하 11세손까지 상주의 지식인을 끊임없이 배출한 집안으로, 근 40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문집이 전하는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떨치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 집안의 문집과 유고를 모아 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 집안은 소학김씨가서(小學金氏家書)라는 유명한 말이 생긴 집안이다. 입재 정종로가 쓴 일묵재 김광두의 행장을 통
청렴해서 무고를 받던 올곧은 서대 김충김 정 찬 1500년에 상주에 살았던 사람 중, 현재의 외남에는, ‘상산사노’라 불리던 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서대 김충이다. 이 분들은 서로 교유하면서 많은 스토리를 남겼는데 군데군데 사적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김충은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마을 서쪽에 집을 하나 지어서 집 이름을 ‘서대’라 하였다. 둘째 사위가 임진왜란 때 상주최초의 의병장인 석천 김각이다. 명문가 집안답다. 우복 정경세 또한 청리. 외남을 기반으로 하는 상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쓴 서대 김충의 행장을 소개
키워드: 상주인물, 흥양이씨,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상주시 화동면, 이우원 흥양이씨는 상주를 대표하는 양반 집안이다. 청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이 유명해 지면서 그 집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두 분은 지금의 청리 가천[닭내]에 살았다. 월간 이전의 ‘체화당’과 ‘창석사당’이 지금도 그곳에 있다. 후손들은 아직도 이 일대에 있지만 여러 지역으로 터전을 옮겼다. 현재 상주시 화동면에 흥양이씨 중 이채하 옹이 있다. 이 어른은 월간 이전 후손인데 오래 전부터 인연이 닿았다. 이 분의 선대 조상을 몇 분 소개
키워드: 장수황씨, 황희, 황뉴, 모동, 백화산, 옥동서원 영남지방은 평소에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는데, 그중에서도 상주(商州)는 더욱 군자들이 많은 곳이다. 모동면에는 백화산이 있고 그 앞에 옥동서원이 있다. 서원에는 황희, 황효헌, 황뉴, 전식 등의 사현(四賢)을 모시고 있다. 황희는 정승으로 드러난 분이고, 축옹(畜翁) 황효헌(黃孝憲)은 절의와 문장으로 세상에 유명한 분이며 전식은 상산삼로(商山三老)로 유명한 분이다. 반간(槃澗) 황뉴는 축옹의 자손으로서 우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시례(
3대 명문가 영산김씨 1500년대의 상주에는 외남 일대에 거주하였던 ‘상산사노’라 불리는 훌륭한 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김언건이다. 김언건의 아들은 상의병 대장인 석천 김각이다. 김각은 ‘상산사호’라 불이며 상주 최고의 인물이라 불리는 창석 이준과 우복 정경세의 스승이면서, 상의군 대장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면, 문무를 겸비한 석천 김각의 삶은 그 집안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 상주의 자랑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러 가지 문헌을 바탕으로 추정할 때, 상주지역의 최초의 의병은 청리와 외남을 기반으로 활동한‘상의병
월간 선생 묘갈문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관련 키워드 : 형제급난도, 체화당, 도남서원, 존애원, 연악문회록, 임술범월록 월간(月磵) 이전(李㙉)은 흥양이씨로 1500년대 중기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 상주의 청리에 살았다. 월간이라는 호는 ‘달빛 어리는 계곡’이라는 의미이다. 지금 수선서당이 있는 청상 저수지 일대에서 살다가 나중에 닭내[가천리]로 옮겨 살았다. 지금 닭내에 가면 체화당[자손번성을 의미하는 집]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그가 살았던 흔적이다. 동생인 이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