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숙이고 순 덕 지난 주말 집으로 세탁기가 배달되어져 왔다. 딸들이 나의 생일선물로 준비했단다.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어미로 남들만큼 해 주지도 못했건만, 아이들은 부족한 어미를 위해 늘 고심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려 한다. 옷, 가방, 신, 화장품, 영양제, 안마기, 여행, 심지어 간식에 나의 직장 일까지 쉬는 날이면 두 팔 걷어 도와준다. 이번 세탁기도 어느 날인가 빨래를 했는데 세탁기에서 탄 냄새가 반복해서 났고, 이를 본 큰 딸이 걱정을 시작하더니 둘째와 의논
큰오빠의 입학선물고 순 덕 “이 마한기(망할 것이) 그걸 우째 이저먹을(잃어버릴) 수가 있노. 의? 의! 거기 우예가 산건동 아나? 니 오빠가 도시락 싸가이 댕기미 식권 모아 가이고 산기라 카드라. 그런데 그걸 이저뿌리! 니는 다 혼날라카믄 아직도 멀었다.” 엄마의 잔조리가 끝이 없다. 중학교 입학선물로 큰오빠가 사 준 시계를 잃어 버렸다. 채 반년도 쓰를 못하고...... 11살 터울의 큰오빠는 내게 중학교 입학선물로 금딱지 손목시계를 사 주었다. 당시만 해도 반에서 시계를 차고 다니는 친구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봄 캐러 가세~~고 순 덕 “순더가 나세이(냉이) 캐러 가자~” “알았어. 잠깐만, ” 양지바른 밭머리엔 벌써 냉이가 붉은빛이 감도는 진초록의 반가움이 손짓을 한다. 나뭇가지를 꺽어 냉이 주변 흙을 파헤치면 봄 향이 바람을 타고 올라온다. 대여섯뿌리 캐어다 된장에 넣으면 향긋한 냉이향이 온몸에 가득 하겠지. 그럼 나도 봄기운에 젖어 나폴나폴 나비처럼 날아오를 거야 기분만이라도...... 조금 성급한 듯 하지만 봄이 오고 있음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설을 지나 땅이 녹기 시작하면 쑥보다 먼저 올라오는 것이 냉이다. 지난 해 마
그 사람, 간첩 이었을까?고 순 덕 설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양지바른 화단에 뾰족뾰족, 진한 향기를 몰고 올 히아신스 새싹을 발견했다. 벌써? 한결 포근해진 햇살을 받으며 산책길에 나섰다. 버들강아지가 뽀송뽀송 뽀얀 털로 남은 추위에 붉어진 속살을 가리고 있다. 봄이 조심스레 다가오는 걸 훔쳐 본 느낌이다. 국민학교 1학년 때였을까? 아님 2학년? 혼자서 산길을 걸어 집으로 털레털레 오고 있는데 버들강아지를 만났다. 뽀얗고 보드라운 털옷을 입은 버들강아지가 얼마나 예쁘던지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가지를 꺽어 들었다. 며칠
나의 산타는 설날에 왔다.고 순 덕 설 명절을 앞두고 엄마는 아랫목에 막걸리로 반죽한 찹쌀을 띄워 유과를 만들었다. 초겨울엔 청국장에게 사나흘 아랫목을 내어 주어야 했고, 아버지가 장에 가신 날에는 뚜껑이 덥힌 아버지의 밥그릇이 아랫목을 차지했다. 그리고 설을 앞둔 지금쯤은 묘한 색과 냄새의 찹쌀가루반죽에게 또 며칠 밤을 빼앗겼다. 반죽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몽글몽글 발효되어 부풀어 올랐고, 엄마는 몇 번을 저어 가스를 빼고 부풀리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녹말가루를 뿌려가며 얇은 반데기를 만들어 넓게 핀 종이포대 위에 널어 말렸다
2월에 피는 꽃고 순 덕 입춘추위가 제대로 한 방 먹인다. 이렇게나 추운데 봄이 오기는 할까? 하지만 시간만 지나면 봄이 온다고 하니, 그 기다림의 시간이 2월이 아닐까 싶다. 열두 달 중 짧은 2월은 유난히도 바쁜 달이다. 졸업이 있고, 입학을 비롯한 새 학기 준비를 해야 하는 달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이삿짐이 오가는 달이고, 가방이나 운동화, 옷가게와 학원가가 붐비는 달이다. 특히나 올해는 설까지 중간에 끼어있어 더욱 분주한 2월인 듯하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은 내가 처음 학교 입학을 앞두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죽을 뻔 했던 날고 순 덕 남편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수씨 펜션 예약한 거 입금을 조금 전에 입금 했어요. 그 날 제수씨 보고 이틀 뒨가? 빙판에 미끌어져 반대쪽 차하고 정면충돌했는데 내차도 폐차시키고, 상대차도 폐차시키고, 죽을 뻔 했다니까. 그래서 정신이 없어가지고 입금을 인제 했네. 확인해 보세요.” 한다. 죽을 뻔!!!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게다가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하늘이 도우셨나보다. 나도 그런 하늘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였을까? 집을 짓고 있어 아래채에서
겨울비 내리던 날고 순 덕 새해가 되면서 한파와 잦은 눈, 지난주엔 봄날인가 싶게 기온이 올라가더니 겨울비가 내린다. 일하는 곳에 예약을 위해 온 손님을 객실과 시설 이곳저곳을 안내하고, 안전점검 나온 공무원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다보니 신 안이 질퍽질퍽 양말까지 다 젖어 버렸다. 그러잖아도 흐린 하늘에 습한 바람, 기분이 더욱 꿀꿀해 진다. 그러고 보니 학교를 다닐 때도 뽀송뽀송 상쾌한 발걸음으로 다닌 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십리길. 초등학교, 중학교 9년을 들길과 산길, 내를 건너고 철길을 넘어 매일 아침 40여분씩
이발소 이야기고 순 덕 미또리, 가리앙, 상고머리, 빡빡이, 단발머리, 컷트. 어릴 적 내 머리모양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 모호하다. 하지만 어디서 머리를 깍았는지는 또렷이 기억한다. 이발소! 우리 마을 회관에는 넓은 회의실과 그 가운데 방으로 꾸며진 방송실이 있었고, 막걸리도 팔고, 뽀빠이도 파는 구판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빨간, 파란선이 뱅글뱅글 도는 이발소가 있었는데, 바로 이 곳에서 계집아이인 나도 머리를 깍았다. 엄마따라 여탕에 가기 싫어하는 사내아이처럼 나도 아부지를 따라 이발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매
우물 안 개구리는 내가 넣었다.고 순 덕 연 초, 일하는 곳에서 2017년 결산 총회를 가졌다. 지난해의 살림도 살피고, 새해의 마을 살림을 맏을 인적자원도 재정비하면서 수도요금에 관한 얘기도 오갔다. 그 날 저녁 둘째에게서 안부 전화가 와서 하루 일과를 물어오기에 상수도에 관한 얘기를 들려 줬더니, 시골에서도 물을 돈을 내고 먹냐며 반문이 쏟아진다. 아니 시골 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그저 받아먹는가? 시골물과 도시물의 차이가 대체 뭐라고...... “그럼 우리 집은? 우리 집도 수돗물이야? 우리 집도 물 값 내?” “우리
야들아 노올자!!!고 순 덕 신나는 겨울방학. 우리는 아무런 약속 없이도 매일 모여 놀았다. 꼬마, 말숙이, 수미, 금동이, 정아, 숙희, 화정이, 민정이, 그리고 순더기, 순이. 언제나 모여 노는 멤버는 같았지만 계절에 따라 놀이는 달랐다. 겨울에 여자아이들이 주로 하는 놀이는 깡통차기와 시게또(얼음썰매), 산태타기, 고무줄놀이를 즐겼다. 작은오빠를 포함한 사내아이들은 연날리기와 제비시게또(칼날이 하나인 얼음썰매)를 즐겨 탔고, 깡통돌리기나 새총놀이, 겨울 산에 올라 콩에 구멍을 뚫어 약을 넣고 꿩잡기나 토끼잡이, 개구리사냥도 했
겨울 먹거리고 순 덕 올해 크리스마스카드 몇 장이나 받으셨나요? 그럼 반대로 몇 장이나 쓰셨나요? 저는 군에 있는 아들 녀석에게 한 장 써 보내야지 생각만 하다가 시기를 넘기고 말았다. 그러니 물론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온 카드 또한 없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건조한 삶이 된 건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낯간지러운 말들을 채운 카드를 썼었는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선물꾸러미도 카드도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는 카드도 봉투도 직접 그리고, 접어 만들어 썼던 기억이 있다. 한 때는 카드를 만들어 장사를 할 생각도 했었다
전화는 사랑을 싣고....고 순 덕 201번. 우리 집 전화번호다. 언제까지 이 번호를 썼는지는 기억이 정확지가 않다. 중학교 때도 이 번호였던 것도 같고, 작은언니 친구가 우체국에서 교환으로 근무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다. 왼손으로 시커먼 전화기 머리를 부여잡고 오른손으로 옆에 있는 손잡이를 드르륵드륵 몇 바퀴 돌리면 상냥한 교환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환입니다.” “여보세요? 209번요.” 하면 신호음이 나고 잠시 후 전화연결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다이얼식 전화기가 나오고, 52-3901로 전화번호가 바뀌었다. 손가
내 이름은 순디기고 순 덕 내 이름은 順德이다. 어떤 이는 ‘순디기’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냥 ‘덕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아시절 젖만 먹여 놓으면 딩굴딩굴 잘 놀고, 잘 자고 순하다하여 순덕이라 이름 지었단다. 무성의한 듯 지어졌지만 난 이 이름을 오십년 동안 들으며 살아왔고, 남은 생에도 계속 듣게 될 거다. 한창 예민하던 중.고등 시절엔 내 이름에 대해 ‘순더기가 뭐람? 조선시대도 아니고....’ 짓궂은 친구들은 이름과 연관된 별명으로 나를 ‘뺑덕어멈’이라 부르기도 했다. 촌에서 나고 자라긴 했지만 촌스러워도 너무
곶감 난방법고 순 덕 감고을 상주의 가을엔 이야기 축제를 한다. 지난해에는 ‘자전거와 나’라는 이야기 경연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빨간 자전거”의 김동화작가님과의 만남을 가진 일이 있었다. 작가와의 만남이란 코너에서 자전거의 도시 상주와 어울리는 빨간 자전거라는 만화작가 김동화님을 초대해 작품과 그의 문학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같았다. 내가 행사장을 어슬렁거리다 작가님의 행사장에 들어간 것은 거의 막바지였다. 평소 “빨간 자전거”를 따뜻한 책이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홍보를 하며 빌려주고 다니는 편이라 작가님을 직접 뵙고
코 찔찔이고 순 덕 눈물 쏙 빠지게 온몸을 괴롭히던 몸살이 물러가고, 이번엔 누우런 코가 콧구멍과 목구멍을 막고 있다. 답답하고 숨쉬기도 불편하다. 휴지를 옆에 끼고 종일 “끄흥 흥 흥.....” 시원지가 않다. 코 밑이 다 헐어 버렸는데도 코는 멈추지 않는다. 두 살 터울의 남편이 가끔씩 나를 어리다 놀리며 하던 말 “내가 교복입고 중학교 다닐 때 넌 코 찔찔 흘리고 다니던게 감히......” 고작 1년 7개월 먼저 태어났으면서 얼마나 유세인지...... 하지만 지금은 진짜 코 찔찔이가 되어 버렸다. 그 옛날엔 누구누구 할 것 없
엄마의 기도고 순 덕 몸살이 났다. 갑자기 찾아든 추위와 연일 이어지는 직장에서의 특별한 일정들, 그리고 포항에서의 지진. 아들이 포항에서 군복무를 하는데 직접 통화를 하기까지 며칠. 마음을 있는데로 조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힘에 부쳤나보다. 으슬으슬 춥고, 머리는 터질 듯 아프고, 피부나 관절들이 다 한마디씩 한다. 너 맛 좀 봐라! 콧속과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타들어 간다. 된통 걸렸다. 때마침 다니러 온 둘째가 옆에서 이런저런 수발을 들어주어 한결 낫기는 하지만, 이런 때는 엄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지금은 튼실한 아줌
가을의 끝자락, 겨울이 뽀얗게 내리면....고 순 덕 힘없이 누운 가을의 끝자락 위에 겨울이 뽀얗게 내렸다. 나뭇가지와 먼 산엔 마치 눈이 온 것도 같다. 괜스레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섰던 마당에서 코끝을 한 방 얻어맞은 듯, 옷깃을 여미고 얼른 방으로 다시 들었다. 춥다. 한겨울보다 이렇게 겨울이 오려 할 때가 난 더 춥게 느껴진다. 이런 계절에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할 즈음이면, 친구도 나도 앞머리가 허연 할매가 된다. 뽀송뽀송 잔머리에 서릿발이 성성하다. 아니 고드름같이 뻣뻣해진 머리가닥이 고개를 흔들면 회초리처럼 뺨을 때
아이들은 사랑이고 희망입니다고 순 덕 오늘은 면사무소에서 해야 할 업무가 있어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조용하던 면사무소 안에 갑자기 웅성웅성 한바탕 웃음이 퍼졌다. “다음 출생신고가 접수되면 회식입니다.” 민원계장님의 결의에 찬 음성. 올해 지역 출생신고 두건이 목표란다. 그래서 이제 두 건째를 앞두고 있다고.... 참으로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지역의 공무원이 아이 갖는 일을 홍보야 할 수 있지만 인명은 제천이라는데 아이를 생기게 하고 낳는 일까지 목표로 두고 책임질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가임인원이 거의 없는 시골에서.
막걸리 추억고 순 덕 울긋불긋 산과 들이, 한들한들 갈대의 손짓이 일어나라일어나라! 나서라나서라! 한다. 엉덩이가 들썩들썩 가슴이 울렁울렁 무작정 어디건 떠나고 싶고, 걷고 싶어지는 계절 가을이 깊었다. 어제 오늘 느닷없이 들이닥친 추위에 이 설렘도 잠시의 머무름인 것을 알기에 더 떠나고 싶지만, 막바지에 이른 가을일이 발목을 잡는다. ‘가긴 어딜 가. 일을 해야지!’ 그래야지..... 이내 큰 숨 한 번 고르고는 다시 감깍기 기계 앞에 앉는다. 벌써 일주일 넘게 계속되고 있는 감깍기 작업. 어깨가 천근만근 무겁고 아프다. 계속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