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명문가 영산김씨

 1500년대의 상주에는 외남 일대에 거주하였던 ‘상산사노’라 불리는 훌륭한 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김언건이다. 김언건의 아들은 상의병 대장인 석천 김각이다. 김각은 ‘상산사호’라 불이며 상주 최고의 인물이라 불리는 창석 이준과 우복 정경세의 스승이면서, 상의군 대장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면, 문무를 겸비한 석천 김각의 삶은 그 집안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 상주의 자랑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러 가지 문헌을 바탕으로 추정할 때, 상주지역의 최초의 의병은 청리와 외남을 기반으로 활동한‘상의병’이고, 상의병의 대장은 석천 김각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물론 이 사실에 대하여 최초니 처음이니 하는 말은 없다. 산재된 기록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할 수 있는 말이다.

 상주의 의병이라 하여‘상의병’이라 했고, 그 의병의 대장이 석천 김각이라 했다는 사실을 상주문화원에서 발간한‘상주문화’라는 책과 기타 자료에서 부분부분 소개하였던 사실이 있다. 또한 최근에는 학술발표회를 통하여 석천 김각의 공적을 천양한 사실이 있다.

 상주 외남면에 있는 영산김씨, 효도로 유명한 운정 김언건은 할아버지, 애국충정으로 우뚝한 석천 김각 이 두 분에서 명성이 끝난 게 아니다. 이 분들의 아래 대에서 가문의 명성을 이어간 김지복이 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집안에서 쓴 일대기[가장]를 소개한다.

키워드: 영산김씨. 상주 외남, 안령, 연악문회록, 의병,

家狀

공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복知復이다. 자는 무회无悔이고 또 다른 자는 수초守初이며 호는 우연愚淵이다. 신라 신무왕에서 가계가 유래하였다. 나중에 공훈으로 영동에 봉해져서 자손들이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말에 벼슬이 판도판서로 영산군에 봉해진 김길원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우찬성을 지낸 김종경을 낳았다. 이 분이 영의정과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김훈이라는 분을 낳았고, 이 분이 공조참의를 지낸 상산군 김득제의 아들이자 참의를 지낸 김장의 따님과 결혼하여 상주에 계속 살게 된 공조참의 김수화라는 분을 낳았다. 이 분이 형조좌랑을 지낸 김민이라는 분을 낳았고 이 분이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공저를 낳았는데 이 분이 공에게는 고조부가 된다. 증조는 장사랑을 지내고 흥양이씨로 효도와 열녀의 행실을 가져 명종 때 세금을 면제해 주고 정려를 내려 특별 예우를 한 분과 결혼한 김자라는 분이다. 조부는 김언건인데 성균관 진사로서 호가 운정芸亭이다. 덕망이 뛰어나고 행실이 돈독하여 고을에서 신망을 받았고 인조 때 증직으로 사헌부 감찰을 받았으며 그 효행을 표창하였다. 부친은 김각金覺인데 호는 석천石川이다. 정묘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국가를 방어하는 공훈이 있어 특별히 용궁현감에 임명되었고 벼슬이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부인은 상산김씨로 사성의 벼슬을 지낸 김충의 따님이자 을묘년에 과거에 급제한 김옹의 손녀이다. 나중에 공의 원종공훈으로 부친과 모친 모두 좌승지와 숙부인이라는 증직을 받았다.

공은 융경 무진년[1568년] 5월 8일에 상주 남쪽 산천리山川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탁월하여 9세에 글을 깨우치고 조금 자라서는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두 선생과 이웃에서 서로 교유하며 학업에 매진하고 서로 바로잡아주는 사이가 되었으며 학문과 행실이 여러 동년배에 추앙을 받게 되었다. 문장은 풍부하고 화려하지만 진부하지 않아 매번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면 꼭 제일 성적이 좋았다. 임자년에 상상上庠[성균관]으로 올라갔는데 당시 여러 간신배들이 국사를 주관하던 때이라서 누구도 감히 윗사람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하지 못했는데 공은 영남의 유생으로서 이이첨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제작하여 비록 사용되지는 못했지만 그 문장의 의미는 통쾌하여 듣는 사람들이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계해년에 임금이 바뀌어 공을 경안찰방에 임명하였는데 잠시 뒤에 물러났다. 갑자년 봄에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가을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유에 임명되었다. 을축년 겨울에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병인년 봄에 병조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옮겼다. 정묘년에 예조로 옮기고 여름에 병조정랑 겸 기주관으로 승진하였다. 무진년 여름에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에 임명되어 겨울에 시강원 문학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기사년 여름에 부호군으로 옮기고 겨울에 영천군수가 되었는데 관대하고 공평하게 군정을 펼쳐 관리나 주민들을 편리하게 하였다. 을해년 여름에 사도시정司導寺正으로 사퇴를 요청하였다. 7월에 맏아들 장례를 치르고 8월에 밀양부사가 되었다. 공은 아들 상을 치른 후로 관직에 뜻을 버렸지만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도착하여서는 정숙하게 받았지만 질병으로 교체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질병이 심해져서 서울에 있는 집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10월 1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다. 목숨이 끊어지는 날f에 절구시 한편을 지어 동계 정온에게 보냈는데 그 내용은 ‘세상의 4대 유래는 일시로 이루어졌는데 한 번 죽고 사는 것을 뭘 놀라겠는가? 다만 원하건대, 온 힘을 다해서 내 육신을 선영에 잘 도착하도록 해 주게.’라 하였다. 죽으면서도 말하는 기세가 여전하고 자연스럽게 죽고 사는 생사의 기로에서도 개의치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안정되게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같이 할 수 가 있었겠는가? 동계 선생이 연석筵席에서 공을 위해 아뢰었더니 임금께서 삼도三道에 명을 내려서 가는 길마다 호송하게 하니 사람들이 참 특별한 대우라고 하였다. 그 다음 해 3월 7일에 상주 남쪽 추산錘山 선영 묘향卯向에 장례를 지냈다. 동계 선생은 시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죽을 때 남긴 시는 비절하고 운구가 고향으로 올 때는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네.’라 하였으니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공의 성품은 관대하고 중후하며 지성스러워 화려하지 않고 기분 상태를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며 부모 섬기는 것과 선조를 모시는 것에는 성성과 온 힘을 다하였다. 형제간에는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고 종족을 대우할 때는 은혜와 의리가 있었다. 여러 조카를 기를 때는 마치 자신의 아들과 같이 하였고 남에게는 온화하게 하여 밖으로 짜증을 내지 않았다. 남의 선행을 보면 말로 칭찬하여 자신은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하였고 남의 잘못이나 악행을 보면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몸 간수를 조심하고 엄하게 하여 집에 있을 때도 법도에 맞게 하고 후배들이 배우기를 요청하면 잘 가르쳐 장려하고 권장하여 정성을 다해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았는데 더욱 지체가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모두 당시 권력자들에게 전염이 되었는데도 공은 두문불출하면서 평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유명한 사람들과 함께 글을 짓고 술자리를 가졌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공의 부인은 관산 전씨인데 직장直長을 지낸 전개의 따님이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공과 같은 산자락이지만 합장하지는 않았다. 공이 돌아가신 지 14년만인 무자년에 소무공훈昭武功勳의 명단에 들어가 증직으로 승정원 도승지를 받았고 부인 전씨는 숙부인을 증직으로 받았다. 아들 2명이 있는데 맏이는 김원이고 진사였다. 둘째는 김달이다. 측실에서 6남 1녀가 있다. 이름은 김일, 김린, 김우, 김섬, 김적, 김후이다. 김우는 의원으로 사과司果를 지냈다. 김후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딸은 안구장에게 시집 갔다. 진사는 선전관 권홍계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1남 3여를 두었는데 잠자는 세익이고 여자는 맏이가 학유를 지낸 이재용에게 시집을 가고 둘째는 배세안에게 시집을 갔으며 셋째는 엄항구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은 모두가 사인士人이다. 김세익은 2남 3여를 두었는데 장남은 김재이고 맏딸은 사인士人 김인섭에게 시집을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이것을 가만 살펴보니, 종 6대조인 우연공의 가장家狀이다. 공의 7대손 집안에서 구했는데 저작한 성명이 없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종 6대손 김헌애가 삼가 기록하다.]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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