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고 순 덕

 나의 엄마는 친구들에게 할머니라 불리웠다.

 세 살, 네 살 터울의 육남매 중 다섯째. 위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언니와 오빠가 또 있었다고 하고, 엄마가 마흔에 나를 낳았으니 내가 학교에 다닐 즈음에 엄마는 머리도 나이도 반백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른 친구의 엄마들은 파마도 하시고, 염색도 하셨지만 우리 엄마는 쪽진머리에 늦게까지 한복을 즐겨 입으셨다. 그런 엄마가 부끄럽진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엄마처럼 화장도 좀 하고, 예쁜 옷도 입고 학교에 오셨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다. 어렸을 적 엄마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을 많이 하셨다. 겨울이 생일인 나에게 “널 낳은 달이라 내가 이키 아픈가보다. 어깨에 바람이 이키 들고......” 바람이 어깨에 어떻게 든다는 거지? 무에 바람이 드는 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맛이 없어지는 거지만 엄마 어깨엔 구멍도 없는데 어떻게 바람이 들어? 어떤 날에는 “야야 여여 머리 좀 들시봐라. 머리가 실라카는가? 이가 술술 기 가는거 거튼기 개루아 못살겠다.” 이는 없었다.

작가의 어머니
작가의 어머니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것과 가려운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또 어떤 날에는 머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약을 먹고, 힘들어 하면서도 밭일을 갔다 와서는 “차라리 일하는기 덜 아파여” 하신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아픈 다리로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하면 더 아프지 어떻게 차라리 덜 아프다는 건지? 엄마는 배고픔도 모르고, 잠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엄마는 늘 내가 학교에 가기 전 새벽 들일을 다녀오셨고, 밤 늦게까지 바느질을 하거나, 밑반찬꺼리를 준비하곤 하셨다. 엄마는 늘 아버지의 목늘어진 런닝을 입었고, 여름이면 쉰 냄새가 나는 밥을 물에 씻어서 드셨다. 동네에 초상이 나거나 잔치집이 있으면 엄마는 새벽같이 그 집으로 불려가 밤늦도록 음식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고 와서는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아이고....”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엄마는 대체 왜 저럴까? 일을 안하면 될텐데, 엄만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울 엄마는 여자가 아닌 줄 알았다. 그리고 난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생각 했었다.

 
 

 몇 일전 찬밥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출근을 했다. 점심시간 밥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더니 살짝 상한 냄새가 났다. 살펴보니 상한상태는 아니지만 먹자니 냄새가 거슬리고 버리자니 멀쩡해 보이던 차에 엄마 생각이 났다. 찬물에 밥을 씻어 먹던 엄마. 아~ 이래서 엄마가 그 때 그렇게 하셨었구나! 그 때의 엄마처럼 밥을 씻어 한 숟가락 먹자니 전화가 걸려오고, 두 숟가락 뜨자니 손님이 오고.... 그렇게 몇 차례 숟가락질을 해도 밥은 줄지 않았다. 불어난 밥만큼이나 엄마생각이 났다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가슴이 먹먹 해 지는 시.

 하지만 어릴 적 난 엄마는 왜 그럴까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내 어깨에도 바람이 들고, 허

 
 

리가 쑤시고, 머리에 이가 기어가는 느낌을 알게 되고, 그때의 엄마가 왜 그런 얘기를 하셨는지 이해가 간다. 나도 엄마처럼 힘이 들어도 차라리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지낸 뒤에 오는 쾌감같은 걸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가 이제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다가온다. 음식, 바느질, 들 일, 부지런함과 성실함 엄마는 못 하는게 없으셨고, 집성촌인 마을의 대소사들을 다 기억하고 챙기는 총기까지 있었다. 엄마는 자연의 모든 변화와 섭리를 몸으로 느끼고 알고 있었다. 당신이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해 내어 주셨다.

 하지만 지금의 난 건망증에 음식은 간도 잘 맞추지 못해 싱겁고, 짜고, 늘 덤벙덤벙 실수투성이다. 큰언니는 엄마의 바느질 솜씨를 물려받아 나 어릴 적 형제들의 옷은 물론 결혼을 하고 얼마 전까지도 가족들의 옷을 직접 짜서 입곤 하였다. 작은언니는 엄마의 음식솜씨를 물려받아 입맛 까다로운 남편도 작은 처형의 음식은 장모님 음식 맛이라며 좋아 한다. 동생은 엄마 표현에 의하면 “저 년은 또 한 푼 생깃는 갑다 곤두박질을 쳐여” 엄마의 심성을 닮은 동생은 제 손에 돈을 들고 있지를 못 한다. 500원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뭐가 필요할지를 먼저 생각하고 400원을 쓰고, 나머지 100원은 없는 듯 챙겨뒀다가 다른 이의 급한 일에 먼저 손을 내 민다. 그 애닯은 100원을 쓰는 사람이 바로 나다. 대체 난 엄마의 무엇을 닮은 걸까? 그토록 엄마처럼은 살지않겠다던 내가 지금은 엄마를 하나도 닮지 않았음에 가슴이 아프다.

 나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가 넷. 우리 아이들에겐 난 어떤 엄마일까?

 엄마는 심심잖게 옛 시집살이나 어렵게 살아온 얘기를 하며 “내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만 열권도 넘을끼라” 하셨다. 그럴 때마다 건성건성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해도 되지 않는 얘기라 흘려들었다. 내 삶이, 내 사랑이, 내 자식이 더 소중하고 간절했기에 엄마의 한이나 아픔, 애환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음식을 하는 방법도, 옷을 마름질하는 것도, 예의도 범절도 이렇게 간절하게 될 줄 진작에 알았다면 엄마와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것을, 엄마의 푸념같은 얘기들에 더 귀를 기울이고, 엄마의 한 많은 이야기를 책은 아니어도 몇 자 적는 척이라도 해 드릴 것을.....

 어리석은 딸은 이제야 엄마의 모습과 엄마의 모든 것을 따르고 싶어 하지만 태산같던 엄마를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음에 검은 구름 드리운 하늘을 올려다 본다. 굵은 빗방울이 엄마의 땀방울처럼 느껴진다. 그렇게라도 엄마를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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