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

고 순 덕

 나이가 들어가면서 초저녁잠은 느는데, 새벽잠은 점점 줄어든다. 아니 새벽이라기보다 오밤중에 깨어나 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런 잠 설침의 원인은 나이도 있겠지만, 텔레비전도 한 몫을 한다. 일찍부터 꼬박꼬박 졸다가 자정을 넘어 잠이 깨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듯 자연스레 텔레비전 전원부터 켜고 화장실엘 간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퇴근을 하고 거실에 들어서면서도 텔레비전부터 켠다. 그리고는 밥을 하거나, 휴대전화 검색을 하거나, 샤워를 하고, 심지어 잔다. 텔레비전은 내게 중년의 남편과 같은 존재이다. 항상 옆에 있지만 존재감 없는, 그러나 없으면 허전하고 아쉬운....

 
 

 그렇게 서방같은 텔레비전이 내 인생에 처음 끼어든 건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인 것 같다. 윗마을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한 집 있었는데 그걸 보려면 매일 10원인가 돈을 내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골아이에게 돈이 있을리 만무하고, 당연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 했다. 그런데 호기심이 많은 언니나 오빠들은 문구멍을 통해 보거나 주인집 아들의 친구들은 특별히 좁은 방구석에 끼어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고, 다음 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엔 온통 전날 본 드라마나 레슬링 이야기가 주인공 이었다. 

 그런데 어느 봄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마루에 커다란 양문형 미닫이문과 긴 학다리를 한 텔레비전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금성!!! 20인치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도 생기다니.... 가방을 집어 던지고는 제일 먼저 앞집 수미에게 자랑을 간 것 같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 샀다고. 그리고는 6시나 되어야 애국가와 함께 시작하는 방송을 5시 반 부터 화면조정 정지화면부터 켜 놓고 기다리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엄마한테 혼나던 기억도 있다. 타잔, 김일 레슬링, 깐돌이, 모이자 노래하자, 수사반장, 장학퀴즈, 딩동댕 유치원, 우리들 세상 등등 흑백텔레비전은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내게 유치원과도 같은 존재였고, 과외학원과도 같았다.

 전래동화나 이솝우화, 안데르센, 명작동화를 난 책으로 읽지 않고 텔레비전으로 보고 익혔으며, 학교 숙제로 낸 독후감들은 다 사실 시청감상문이라 해야 옳았을 것이다. 동물의 왕국과 장학퀴즈, 지금 EBS방송의 모태였을 초등 퀴즈프로그램도 있었던 것 같다. 바보상자라고도 불리던 텔레비전은 어린 나에게 세상을 눈뜨게 했고, 표준어를 가르쳤다.

 
 
 
 

 

 

 

 

 

 

 그런 텔레비전을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가는 큰언니가 사 주고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큰언니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실. 텔레비전을 산건 아버지셨고, 작은 오빠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텔레비전을 사기 전 언제부턴가 작은 오빠가 학교만 다녀오면 가방만 있고 사라졌다. 아버지 대신 소풀을 뜯고 먹여야 하는 것이 작은오빠의 일이었는데, 집에 소는 굶기고 어디서 놀다 오는지 저녁밥도 먹는둥마는둥, 화가 난 아버지가 알아보니,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그 집에 소풀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길로 텔레비전을 사 오셨고, 아버진 그 집과는 달리 돈을 받기는커녕 밀창(미닫이 유리창)이 있는 마루에 텔레비전을 두고 문을 열어 동네사람 누구라도 텔레비전을 보게 해 주었다.

 요즘 같은 여름날 밤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이웃들이 모여 매캐한 모깃불을 피워두고 김일의 레슬링을 보았다. 장발의 코쟁이나 가면을 쓴 상대가 김일선수를 치면, 함께 아파하고 가슴을 졸였다, 피투성이의 김일이 박치기 한방에 경기를 끝내면 모두가 박수로 환호를 했다. 주말 해질녘이면 타잔을 했는데 코끼리 소리와 어우러진 타잔의 동물들을 부르는 소리를 내보지 않은 아이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아아~ 아아아아~~~~” 한참 넋을 놓고 보는데 흑백의 화면에 모래알파도가 친다. 소리도 “치이~~~치이칙” 그러면 오빠는 재빠르게 그러나 조심조심 지붕위에 올라 안테나를 잡아 좌`우로 돌린다. 그러면 화면에 모래파도가 더 거세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면, 아버지가 소리를 치신다. “아니 그 쪽 말고 반대로. 쪼매만 더. 아니아니 아까매로.

 됐다됐어 그대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 다음에 오빠는 더 열심히 지붕을 올라야 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했고, 말

 그대로 안방극장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텔레비전에 색이 입혀지면서 점점 다이어트를 해 소형화 되더니, 지금은 다시 벽면을 다 채울 만큼 커진 벽걸이형에 얇은 굴곡이 있는 화면으로까지 발전했으니 참 좋은 세상이다. 밤늦게 하기에 어릴 적 난 좀체 볼 수 없었던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더빙된 영화를 보고 언젠가 엄마가 하신 말씀 ”저 코쟁이는 우리말을 잘 하네.“ 얼마나 우습던지. 엄마 기중으로 본다면 지금은 우리나라 배우들도 외국에 나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세계 각 국어를 얼마나 잘 하는가? 그 때는 채널도 단 둘. 8번과 10번 이었나? MBC, KBS 뿐이었지만 볼 것도, 보고 싶은 것도, 기억나는 것도 많지만 지금은 손발가락을 다 세고도 넘을 채널들이 있지만 글쎄 예전의 수사반장처럼 가족을, 이웃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함께 분노하고, 웃게 하며 통쾌해 하는 프로그램이 몇이나 될까? 지금도 옛날 TV나 대한늬우스를 보면 정감이 간다. 고개가 끄덕여 진다.

 나는 숙제를 하고 있는 지금도 중년의 서방같은 소리상자를 켜 둔 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 다음 내가 세상을 떠날 때 텔레비전도 함께 보내 달라 유언을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홀로 떠나는 먼 여행길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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