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같은 큰언니

고 순 덕

 요즘 내 사는 곳에는 비도 많이 쏟아지지만, 깨도 많이 쏟아진다. 그것도 참깨다. 긴 가뭄에 깨를 심고, 또 심고 겨우 뽀족히 나오면 벌레가 따 먹고, 그러면 엄만 또 새벽같이 밭에 깨를 머들구러(이식, 보식) 나가셨다. 그리고는 몸배(일바지)가 이슬에 축축히 젖어 돌아오셨다. 무섭던 폭염 속에 제 속살을 채웠던 참깨는 주머니주머니 가득한 뽀얀 깨알들을 이제 톡톡 어머니의 막대 노크에 문을 열어 깨알을 쏟아낸다. 우수수 솨르르....

 
 

 특수작물이라고는 과히 많지 않던 그 시절, 특히나 내 살던 고향엔 밭보다는 논이 많았다. 그래서 여름에 돈이 될 만한 무엇이 없었기에 깨는 아주 큰 수입원 이었다. 양지마를 지나 뒷골에 두 개의 밭이 있었는데, 꿀밤나무가 많은 낮은 산 앞에 골이 긴 밭과, 그 앞에 그보다 골은 짧지만 큰집 밭과 고랑을 사이에 두고 또 한 개의 밭이 더 있었다. 거기에 엄마는 고추 서너골에 목화도 심었고, 참깨에 고구마, 팥, 밭가에는 수수도 심으셨다. 목화는 큰언니 시집갈 때 이불을 해 줘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고, 수수는 첫 외손주 수수팥떡 해 줘야 한다고 심으셨던 것 같다.

 
 

 우리 밭에는 그 외에도 내가 기억 못하는 여러 종류의 곡식과 야채들이 자랐다. 아! 깨를 찌고(베고, 수확하고)나면 태풍이 지나 가고, 거기에 가을배추와 무도 심었지 참. 그런 작물들 가운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집에서 먹기 위해 키운 마늘과 자주감자 외에 참깨는 첫 수확물 이었다. 큰언니와 큰오빠는 장성해 도시에 나가 제 밥벌이를 했지만, 작은언니와 작은오빠 그리고 나와 동생까지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줄줄이 등록금이며, 차비를 엄마는 깨를 팔아 보태셨다. 요즘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교육비 부담이 없지만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진가 누런 정사각의 육성회비 봉투를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콩이 들어간 급식 빵 값도.

 그 시절엔 누구나 그랬겠지만 없는 살림에 육남매를 먹이고, 입혀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되셨을까? 엄마는 일요일 아침 캔디에 빠져있는 나를 재촉해 당신은 커다란 보따리를 내게는 작은 보따리를 머리에 얹어 용궁장으로 깨를 팔러 갔다. 아니 깨 뿐 만 아니라 엄마의 요술같은 다락에서 양대며, 팥 등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는지 조목조목 챙겨진 보따리가 풀어지고, 다시 싸 메고.

 문경군의 집에서 예천군의 용궁장까지는 시오리도 더 되는 길. 뚜벅뚜벅 종종. 캔디를 보는 것도 포기하고 그 먼 길을 따라 나선 건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 주시려나? 아님 새 옷이라도 하나....’ 하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곡식은 엄마가 오빠라 부르는 외가쪽 아저씨의 노점에 내다팔았는데,

 추가 달린 저울에 올리거나 매달아 실을 이리로 밀고 저리로 당기고, 수평을 이루면 되가 좋네 하시며 매번 좋은 가격을 받았다. 그러나 엄마는 단 한번도 자장면을 사주지도 새 옷을 사주지도 않았다. 치마 속 고쟁이에 달아 붙인 주머니에 들어가 삔침(옷핀)을 꽂으면 그것이 금고요, 다시 나오지를 않았다.

 엄마의 참깨는 또 명절이 오거나, 서울에 갈 때는 기름집에서 참기름으로 짜서금복주 병에 넣어 종이를 돌돌 말고, 귀한 비닐을 잘라 마감한 병뚜껑을 꽂아 사촌오빠들이나, 이모, 도시에 사시는 작은엄마(실은 큰어머니 두 분 중 둘째 큰어머니)께 드렸다. 물론 시집 간 큰언니도. 치! 엄마는 나도 깨 머들구고, 찔 때, 떨 때 다 도와줬는데. 나는 머리방울도 하나 안 사주면서, 심지어 나물을 무칠 때도 엄마는 진짜 딱 한 방울의 참기름만 똑! 그러면서 저 사람들에게는 저렇게 퍼 주시나 했는데, 내가 지금 촌에 살아보니 그렇다. 없어 못 나누지 있으면 뭐든 나누고 싶은 게 형제의 정이고, 농촌의 정서이다.

 
 

 그런데 요즘 엄마의 참기름 나눔을 하는 이는 촌에 사는 내가 아니라 대구에 사는 큰언니다. 직접 농사지어 짠 것은 아니지만 처음엔 언니의 시댁에서 올라온 참기름을 나눔 했었나(?) 그랬고 지금은 일부러 깨를 사서 직접 씻고 말려 기름을 짜, 가족모임이 있을 때면 집집마다 한 병씩 갖다 안긴다. 역시 소주병처럼 생긴 기름병을 깨질세라 신문에 돌돌 말고 또 말아 봉지에 꽁꽁 싸서. “내가 너들한테 해 줄끼 뭐가 있노. 맘은 안그런데 내가 뭐 가진기 있어야지. 이거라도 한 개씩 줄 수 있을 때 받아라.”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언니의 말에서 엄마 냄새가 난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냄새는 땀 냄새였던 것 같다. 늘 아버지를 대신해 밭일이며 들일을 도맡아 하셨고, 땀에 절어 계셨던 엄마. 이제는 그 자리를 큰언니가 대신하고 있었다.

 
 

 지난 봄 오디가 날 무렵 남매들이 우리 집에서 만나 참기름 나눔을 했는데, 마침 우리 집에는 선물 들어 온 참기름이 두 병이나 있었는데도, 한집에 하나씩이라며 배당을 하는 큰언니. 안양 사는 막내가 이번 여름휴가를 또 우리 집으로 왔을 때 큰언니도 막내를 보겠다며 왔다. 역시나 참기름을 안고. 막내는 지난번 마침 참기름을 빠트리고 갔다가 이번에 챙겨가려 했는데, 또?!두 병의 참기름을 싸며 “언니 덕에 고소함이 풍년일세!” 한다. 물론 우리 집에도 참기름 또 한 병 추가!

 무더위 끝자락 입추도 지나고, 깨알같은 수확의 계절이 시작 된다. 고추따기, 깨털기.....우리네 세상살이에도 정이 담긴 고소함이 풍년이길 고대 해 본다.

고순덕무식은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무식하기에...용기를 낼 수 있었던아직은 철없이 꿈을 꾸는 산장의 아낙 입니다.
고순덕무식은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무식하기에...용기를 낼 수 있었던아직은 철없이 꿈을 꾸는 산장의 아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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