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7.10.18 수 16:12
> 역사인물 > 상주역사인물연구소
소학김씨가서(小學金氏家書) 일묵재 김광두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의 종가시리즈 7번째
변해철 편집국장  |  ynt@yntoday.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9.06  09:31:20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소학김씨가서(小學金氏家書) 일묵재 김광두

김 정 찬

   
▲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상산김씨 11세손인 일묵재 김광두는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과 교유하면서 당대를 이끌어간 상주의 지식인이다. 지금의 모동면 송포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묵재 이하 11세손까지 상주의 지식인을 끊임없이 배출한 집안으로, 근 40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문집이 전하는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떨치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 집안의 문집과 유고를 모아 <상산세고>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 집안은 소학김씨가서(小學金氏家書)라는 유명한 말이 생긴 집안이다. 입재 정종로가 쓴 일묵재 김광두의 행장을 통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 알 수가 있겠다. 행장은 다음과 같다.

 일묵재(一黙齋)선생 김공(金公)의 휘(諱)는 광두(光斗)요 자(字)는 여우(汝遇)다. 김씨의 시조는 신라 알지왕이다. 고려조에 이르러 휘 조(祚)가 있으니 상산(商山)으로 관향을 삼았고 벼슬은 시중(侍中)이요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다. 이 분이 공(公)에게 11대조가 된다. 시중이 휘 고(固)를 낳으시니 문과(文科)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이 분이 휘 순경(純卿)을 낳으시니 문과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다. 이 분이 휘 귀(龜)를 낳으시니 생원(生員)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낭장(郎將)을 지냈다. 이 분이 휘 경신(敬臣)을 낳으시니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이 분이 휘 약(若)을 낳으시니 생원과 진사(進士)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국량(國良)이니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인(仁)이니 진사요 문학(文學)으로써 당시에 추중(推重)되었으며, 어머니 상산김씨는 공(公)과 관향은 같으나 근원이 다른 학생 사숙(嗣叔)의 따님이요 부제학 상직(尙直)의 7대 손녀다.

 공(公)은 가정(嘉正) 임술년(壬戌年․1562) 12월 17일에 태어났다. 기질이 맑고 깨끗하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와 지극한 성정을 타고나 겨우 6~7세에 능히 문장을 짓고 시를 지었다. 10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는 상례를 받들어 행함에 슬퍼한 나머지 몸이 상하게 되었는데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그가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할 때 어머니께서 과업을 독려함이 매우 엄격하였다. 글을 이해하여 공부하러 갈 때 날마다 노비를 함께 따라 보냈고 돌아왔을 때 독서한 부분에 아직 환하게 통하지 못한 게 있으면 곧 채찍을 가하고 노비에게 가서 알아오게 하였다. 이로써 공의 문학과 덕행이 일찍 성취되어 이미 학문을 이룬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6세에 향해[鄕解․향시]에 합격하였고 20세에 어머니상을 당하여서는 장례의 모든 예절을 하나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며 여묘(廬墓)하고 죽을 먹으며 3년상을 마쳤다. 임진왜란(1592)에 왜구가 상주를 함락하자 남들은 다 새가 도망치듯 하는데 공은 우리 선조 문장공[文莊公․鄭經世]과 조검간[趙黔澗․靖], 전사서[全沙西․湜], 강남계[康南溪․應哲], 조북계[趙北溪․光璧], 채별좌[蔡別座․有孚] 등의 제 선배들과 같이 함창 황령사(黃嶺寺)에서 창의하여 병사를 모으고 적을 토벌하며 군량과 무기를 구함에 공의 힘이 컸다. 난리가 조금 진정되자 공이 송령(松嶺) 아래 집을 지었는데 집안이 쓸쓸하고 적막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오직 성현의 경서에만 마음을 집중하였다. 회포를 읊은 시에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함은 있으나 다른 것을 부러워하는 내용은 없었다. 책 상자를 짊어지고 서애(西厓) 류선생[柳先生․成龍] 문하를 왕래하며 이로운 말을 청하고 질의하여 조예(造詣)의 정교함을 얻었다.

 병오년(丙午年․1606)에 비로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공은 어버이가 계시지 않음을 애통히 여겨 손님을 청하는 자리는 베풀지 않았다. 이듬 해(1607) 가을에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그때 창석[蒼石․李埈]이 왕의 어진 이 구하는 뜻에 응하여 경연에서 공으로써 대답을 드렸다. 왕께서 신하를 부르는 명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공의 병세는 더욱 위중해졌고, 무신년(戊申年․1608) 정월 18일에 이르러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4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명을 더 내리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3월 모일에 상주 동쪽 청룡산(靑龍山) 중방록(中坊麓)에 장례하였다가 59년 뒤인 병오년(丙午年․1666)에 검오산(黔烏山) 경향(庚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키가 크고 이마가 넓었으며 훌륭한 태도와 풍채가 준수하고 맑았다.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고 언론이 훌륭하였으며 의리와 이익을 분별하되 속마음이 곧아 숨김이 없었다. 폭로하여 드러냄이 없고 모나거나 경계 짓는 일이 없어 공을 논하는 사람들은 위인(偉人)과장덕(長德)으로써 칭송하였다. 계사년(癸巳年․1593)에 굶주린 백성을 구휼할 때 존재(存齋) 곽공[郭公․䞭, 忠烈公]이 둔전(屯田)을 관리하는 일과 재물을 베풀어 굶주린 이를 구휼(賑恤)하는 일의 감찰을 겸하여 상주에 도착하였다. 공을 한 번 보고는 곧 예의로써 대우하여 말하기를, ‘나의 사표(師表)이다. 이같은 분이 굶주림1)의 재앙을 받게 하랴.’라 하고, 사람의 수만큼 먹도록 해 주었다. 재차 상주에 왔을 때 공이 병석에서 고을 세수로 살아가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몹시 놀라 말하기를, ‘보통 사람 천 백 명을 살리는 것이 이 한 사람을 살리는 것만 못하다.’ 라 하고 특별히 먹을 것을 보내어 구제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의 백씨 감사공(監司公) 및 아우 참봉공(叅奉公)에게 말하기를, ‘전란 뒤에 가히 더불어 혼인을 의탁할 자는 오직 상산(商山) 김모(金某)뿐이다.’라 한 까닭에 공의 따님은 곽월[郭越․ 定齋]의 손부가 되었고, 공의 아들(塾)은 곽은(郭赾)의 사위가 되었다.

 평소에 다급한 사람을 돕는 의리가 있어 임란 초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공에게 의뢰하여 재물과 혹 전답으로 목숨을 구한 자가 많았다. 난리가 끝난 뒤 거처할 만한 곳을 정하고는 모두가 공에게 갚으니, 공이 당시 집이 가난하였는데도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바른 기상이 남달라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장차 건립하려 할 때 옛 절의 고탑이 가까운 곳에 있어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주추와 섬돌로 쓰기로 논의하고 훼철하자 풍우가 문득 일었는데 괴이하게도 이같은 일이 자꾸 일어나자 일꾼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웃으며 가서 감독하여 허물어내자 다시는 요괴한 일이 재발하지 않았다.

 일찍이 아버지와 벗 나이 되는 어른이 공이 필법(筆法)에 능한 까닭에 그 선대의 신주(神主)를 고쳐 쓰려고 요청 하였다. 그의 선대는 곧 혼란한 조정[연산조]의 아첨인이었다. 공이 막 쓰려고 하니 비로소 기분이 홀연히 불평함을 깨닫고 사양하여 쓰지 않았다. 공이 악을 미워하는 강의함이 이와 같았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고향의 동 시대 제현과 서로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는데, 우리 선조[우복愚伏]는 ‘정직하고 성실한 벗(直諒友)’으로 칭송하였고, 뜻을 지킴에 수구여병(守口如甁)보다 나음이 있어 일묵재기(一黙齋記)를 지었다. 또 ≪심경(心經)≫ 한 부를 주어 끝까지 연구하고 연마하기를 기대하였다.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려 하였으나 집안에 돌림병의 걱정이 있고 장사를 치를 형편이 못 되어 창석선생(蒼石先生)과 한 고을의 선배들이 연명으로 지주[상주목사]께 글을 올려 관청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르고, 또 제현이 같이 뇌사(誄辭)를 지어 애도하였으며, 어떤 분은 공의 특수한 기운[間氣]을 칭송하기도 하였으니 우연은 아니었다.

 이 뒤 거의 이백 년이 된 지금의 병오년(丙午年․1786)에 향인들이 공을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제향(躋享)하였다. 대저, 공의 자질이 특이하고 의리를 행함이 탁월하며 학식과 언의(言議)가 준엄하고정직하여 사우(師友)의 기대하는 바가 이와 같고 공론이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은 까닭에 가능하였다.

 유독 남긴 글을 잃어 없어졌고 공은 또 평소에 시에 정교하여 대가(大家)로 추앙되었으나 그 시편도 전함이 없으니 아깝도다. 부인 감천문씨(甘川文氏)는 증(贈) 좌랑(佐郞) 경세(經世)의 따님이요 장령(掌令) 관(瓘)의 증손녀이다. 얌전하고 정숙하며 현명하고 온화하여 군자의 배필이 되어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보다 3세 먼저(1559年) 태어나 공보다 23세 뒤에 별세(1631年)하니 향년 73세였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5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기(基)․희(墍)․숙(塾)․보(堡)․승(塍)이요 딸은 곽창후(郭昌後)에게 출가하였다. 공(公)은 여러 아들을 가르치되 반드시 ≪소학(小學)≫책으로써 가르쳐 사람들이 ≪소학≫은 ‘김씨가의 책[小學金氏家書]이라 일컬었다. 기(基)의 호는 송와(松窩)로 나의 선조[愚伏]에게 학업을 닦아 학문에 독실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인천(仁川) 채참봉(蔡叅奉) 유부(有孚)의 따님과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고 후취(後娶)는 진주(晋州) 강여복(姜汝輻)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수(震遂)․진익(震釴)이요 딸은 변유량(邊有亮)․왕락(王珞) 진사(進士)․남천각(南天覺)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희(墍)의 호는 부암(俯巖)인데 처음 아내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자식이 없었다. 두 번째 부인은 남양(南陽) 홍선전관(洪宣傳官) 석노(石砮)의 따님으로 3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경(震鏡)․진화(震鏵)․진흠(震欽)이요 딸은 송의(宋顗)․채형징(蔡亨徵)․강한주(姜漢柱)에게 각기 출가하였으며, 측실 소생이 2남 1녀로 아들은 진갑(震鉀)․진봉(震峰)이다. 딸은 송지분(宋之分)에게 출가하였다. 숙(塾)은 포산(苞山) 곽참봉(郭叅奉) 은(赾)의 따님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승(塍)의 아들 진감(震鑑)으로 대를 이었다. 보(堡)의 호는 무민(无㦖)이니 역시 나의 선조(愚伏)에게 수학하여 조예가 뛰어나고 효우가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여량(礪良) 송판결사(宋判決事) 이기(以琦)의 따님과 결혼하여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약(震鑰)․진용(震鏞)․진옥(震鈺)․진협(震鋏)․진류(震鏐)․震鏛)이다. 딸은 채극철(蔡克哲)․이염(李枏)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승(塍)의 호는 운암(雲巖)이니 청주(淸州) 한상(韓瑺)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후취는 신천(信川) 강신창(康信昌)의 따님으로 7남 5녀를 낳았다. 아들 진감(震鑑)은 출계(出繼)하였고, 다음의 아들은 진박(震鑮)․진전(震銓)․진선(震銑)․진순(震錞)․진종(震鍾)․진일(震鎰)이다. 딸은 정소(鄭韶)․김후(金垕)․이선(李橏)․김중현(金重鉉)․한익삼(韓益三)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곽창후(郭昌後․사위)는 4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태원(泰元)․태형(泰亨)․태재(泰載)․태도(泰道)이다. 딸은 박숭문(朴崇文) 호군(護軍)․서수겸(徐守謙) 참봉(叅奉)․박진인(朴振仁) 진사(進士)․하달한(河達漢)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 현손이 3백 여 명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 경신재(일묵재 一齋 김광두(金光斗)의 선생의 재실)

 선생의 현손 상흠(相欽)씨가 가장(家狀)을 지니고 와서 나[鄭宗魯]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행장(行狀)은 옛날에 문장공(文莊公․愚伏)이 일찍이 쓰려고 마음에 두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고, 조부 침랑공(寢郞公․鄭冑源)이 선대의 정의(情誼)를 생각하여 역시 마음에 두었으나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증조부 무민공(无㦖公)이 지은 우복선생 제문 및 일묵재선생 가장(家狀)과 발문[정주원 지음]으로 입증할 수 있다. 지금인즉 오직 그대의 책임이니 그대가 어찌 힘쓰지 않으랴!’라 하였다. 종로(宗魯)가 그만한 사람이 못되고 그만한 문재(文才)도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상흠씨가 다시 와서 더욱 은근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지연되어 오늘에까지 오게 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슬픈 마음도 생겨 드디어 절하고 가장(家狀)을 받아 공경스럽게 열람하고 분수에 넘치게 방자함을 무릅쓰고 삼가 본 가장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찬술한다.

 

정조(正祖) 14년 경술(庚戌․1790) 청화절(淸和節․4월)

후학(後學) 승훈랑 의금부 도사 진양(晋陽) 정종로(鄭宗魯) 근장(謹狀)

변해철 편집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37200 경상북도 상주시 중앙로 130(낙양동)202호   |  대표전화 : 054-535-0069  |  팩스 :0504-046-1517
등록번호 : 경북 아00320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변해철  |  E-mail : ynt@yntoday.co.kr
후원계좌 : 농협352-0787-9603-63(예금주 영남투데이)  |  사업자등록번호 : 511-90-61532
(본신문에 게제된 컨텐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책임은 영남투데이에 있습니다.)
Copyright © 2017 영남투데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