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 콩쿠르

고 순 덕

 조석으로 선선한 기온에 밤송이도 입을 쩌어억 벌리고, 벼이삭 낱알이 햇살에 영글어가는 그야말로 가을임을 누가 부인 할 수 있겠는가? 코스모스 하늘하늘 첫사랑 소녀를 연상하는 중년의 남정네들도 있을 것이고, 다가오는 추석명절 뒷동산에서 하던 콩쿠르대회의 기타 치던 딴따라 오빠를 생각하는 철없는 아짐은 바로 여기 있다! 지난 토요일 저녁, 일하는 곳에서 도시민과 지역주민들을 초대해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뮤지컬 가수, 플롯연주자, 전국노래자랑 최우수 수상자, 가수 못지않은 가창력을 가진 선생님 등의 공연을 선두로 마을을 방문한 도시민들과 주민들이 무대에 올라 그 밤의 흥겨움을 노래와 춤으로 풀어 나가는 시간을 보냈다. 

칠곡군,‘일자리창출’5년 연속 우수기관 선정
칠곡군,‘일자리창출’5년 연속 우수기관 선정
 
 

 오랜만에 고향의 옛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고 하는 분도 계셨고, 평소 접하지 못하던 영역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는 분도 계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봉사를 업인 듯 하는 친구의 도움 덕분 이었다. 노인복지시설이나, 오지의 섬,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작은 음악회를 무료 공연하는 친구, 그리고 그 멤버들. 세분의 가수와 엔지니어, 봉사단 회원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당신들은 진정 날개 없는 천사들 이십니다. 물론 재능을 기부해 주신 출연자 여러분들 역시 감사합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런 행사를 계획한데는 지친 여름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보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 옛날 명절을 전`후로 마을마다 열리던 콩쿠르대회를 회상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 때는 마을마다 청년도 많았고, 또래가 적어도 열 대여섯에서 큰 마을에는 스물도 넘다보니, 그들이 모여 매년 음악하는 일명 딴따라들도 부르고 동네 어른들의 쌈짓돈을 찬조금으로 받아 행사를 준비 했다. 수익금은 자신들의 계금이나 마을 발전기금으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또래는 어려서 그런 것이 이미 없어졌지만 큰언니나, 큰오빠, 작은언니, 작은오빠의 또래까지 했던 것 같다. 우리 집 뒤에는 민둥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에 마을 청년들이 나무와 천막을 사용해 무대를 설치하고, 반짝반짝 색색의 불빛도 달았다. 상품으로는 냄비, 바가지, 설탕, 삽 뭐 그런 생활용품들 이었던 것 같고, 찬조를 하게 되면 찬조하는 사람의 이름과 금액을 적어 무대 앞에 주렁주렁 걸어두고, 노래를 한 곡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예닐곱 때였을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거금 200원을 들고, 어둑어둑한 뒷산을 반짝이는 불빛과 요란한 음악소리에 홀려 찬조금을 내러 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높고 예쁜 무대에 올라 ‘학교종이 땡땡땡’을 불렀다.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예쁘다며 200원보다 더 많은 용돈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끄러움이 무언지, 두려움이 무언지 전혀 알지 못하던 꼬꼬마시절, 그것이 나의 공식 첫 무대이자 마지막 무대였다. 난 타고난 음치로 중학교 시절 음악실기 시험 때도 점수가 낮아 선생님을 조르고 졸라 몇 번을 다시 불러야 기본 점수에서 마지못해 2~3점 올려주는 정도였다.

 어쨌건 그 행사로 도시로 나갔던 청년들도 마을에 남아있던 청년들도 한데 모여 얘기하고 즐기는 시간 이었으며, 고향을 찾는 귀향객에게도 즐거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 주었다. 소녀가 되어갈 즈음에도 뒷동산에서 그런 행사를 계속 했었는데, 당시엔 요즘 7080이라 부르는 그룹사운드 음악이 대세였던 시절로 전자기타 연습하는 소리가 늦은 오후부터 들리기 시작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얼른 해가지길 기다렸다. 번쩍이는 불빛아래 기타소리 선명한 휘버스의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건아들의 ‘젊은 미소’, 활주로의 ‘탈춤’, 옥슨80의 ‘그대 떠난 이 밤에’ ‘불놀이야’ 등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나왔던 노래들이 당시엔 학생들이나 젊은 층의 인기를 얻었다.

 
 

 나 또한 그 학생층의 한 사람이었고, 화려한 불빛아래서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는 놈들이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몰래 무대 뒤로 가서 말 한 번 걸어보려 쭈뼛거리기도 했더랬다. 지금은 웃음이 베어나는 지난 추억. 만약 내 아들이 공부는 않고 기타치고, 드럼 두드리며 돌아다닌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아마도 멋있다는 생각보다는..... 이젠 내가 속세에 찌든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거다. 아닌가? 오히려 더 열심히 연습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말 그대로 스타가 되라 격려해 주었으려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원한 바람에 코스모스 향 실려 오는 가을. 이번 추석엔 어떤 추억들이 생겨나게 될지. 마을마다 옛 노래자랑을 한 번 재현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푸짐한 상품이 없으면 어떠랴, 고향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마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모두가 좋아보이게 하는 술 한 잔 나누며 얘기할 수 있다면, 이 보다 좋은 상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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