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수

고 순 덕

내서면 곶감 농가를 방문하여 애로사항 청취 및 격려
내서면 곶감 농가를 방문하여 애로사항 청취 및 격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처음 한글을 만들 때 소리나는 기관의 모양 본 떠 ㄱ, ㄴ, ㄷ, ㄹ....이 생겨났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한글을 배울 때는 ㄱ은 낫하나, ㄴ은 의자, ㄷ은 땅굴, ㄹ은 찦차.... 하면서 배웠었다.

 당시 담임선생님만의 수업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ㅏ를 더하려면 세로부분은 전봇대, 가로 부분은 길이라고 표현을 해, ‘가’의 경우 ‘낫 하나, 전봇대, 길’ 하면 ‘가’라는 글자가 쓰여 졌다. 지금 생각하면 꾀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 것 같지만 그 때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아주 쉬운 방법의 한글 배우기였다. 배운 것이 그래서인지 나도 큰아이에게 세 살 때부터 한글을 가르치면서 ㄱ은 안녕하세요? ㄴ은 배웠던 그대로 의자, 뭐 그런 방식으로 글자를 가르쳤다. 그러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이쿠 잘 하네!” 라는 말이 칭찬이라는 걸 아는지 힘도 없는 손으로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리듯 제 이름 석자를 그리곤 했었다.

 
 

 내가 내 선생님의 한글 익히기 법을 따라하면서도 ㄱ을 낫하나에서 안녕하세요로 바꾸어 아이에게 가르친 것은 우리세대는 낫이 무언지 알고 자랐지만, 내 아이는 낫을 잘 모지 못하고 자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게 낫은 벼를 베는 도구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작은 오빠의 엄지발가락에 큰 흉터를 가져다 준 무서운 놈! 요즈음 우리 마을에서는 벼 베기가 한창이다. 아니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 마을길에는 무법자인 나락이 떡하니 차선 하나를 장악하고 일광욕을 즐긴다.

 예전엔 이렇게 벼 말리기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도 그럴것이 벼를 손으로 베다보니 벼베는 시간도 길었고, 벤 벼는 단을 묶어 논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줄지어 서서 한동안 타작 전 미리 일광욕을 충분히 했다. 마을에 한두 대 있는 탈곡기가 우리 집에 올 때까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모내기 할 때는 이웃면에서 많은 사람들을 새벽같이 불러와 몇 일만에 후다닥 일을 마쳤지만, 벼베기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잘 못된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몇 날 며칠을 두고 부모님은 간단히 들밥을 싸서 벼베기를 하셨고, 일요일면 어린 우리들까지 일손을 거들어야만 했다.

 
 

 아버진 식전에 미리 들에 다녀오셨고, 우린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혼은 텔레비전에게 내어주고, 길 잃은 숟가락질을 하다가 혼나기 일수였다. “얼릉 밥 안먹나? 빨리 먹고 너들 올도 못밑에 나락 비로 가야 댄데이!” 학교를 일찍 마치고 온 어제 오후에도 했었는데 또..... 엄마의 잔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결국 아버지의 호통으로 변해야 눈물 찔끔이며 급하게 밥을 구겨넣고, 우리는 엄마를 따라 물주전자와 숫돌, 식구 수대로 낫을 챙겨 들로 나섰다. 정작 아버지는 깨끗하게 차려 입고 장엘 가시고, 엄마는 늘 아버지 몫까지 갑절을 더 엎드려 땀을 흘리셔야 했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섭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고생하시는 걸 알기에 일단 들로 따라는 갔지만, 그 가을의 햇살은 나락만큼이나 따가웠다. 손도 크고 힘이 있는 엄마나 작은 오빠는 서너 포기씩 한꺼번에 “쓱쓱 두두둑 뿌두둑” 빠르게 잘도 베었지만, 동생과 나는 한두 포기씩 안간힘을 다 해 베자니 일도 줄지도 않고, 연신 물을 마시거나 참새마냥 앉아서 나락을 까먹다가 또 혼나고. 결국 생각한 것이 엄마와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 두어줄 땅굴처럼 길게 베고 들어 가 그 속에서 다시 넓게 벼를 베어 요새를 만들고, 참으로 삶아간 고구마를 야금야금 먹다가 동생과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야들아 너들 다 어데 있노? 뭐하는 기라?” 엄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얼른 시치미를 떼고 급하게 엄마가 있는 곳으로 나가보니 작은 오빠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논둑에 앉아 있었다.

 
 

 누구보다 엄마 돕기를 열심히 하던 오빠도 나보다 네 살 많기는 하지만 아이는 아이인지라 낫질을 하다가 힘이 부쳐서였는지 벼를 잡는 손이 작아서였는지 낫을 있는 힘껏 당기다 엄지발가락 위를 그만 낫으로 훅..... 오빠는 엄마가 걱정할까봐 아프지만 소리내어 울거나 말하지도 못하고, 논둑에 앉아 혼자서 피가 나지 말라고 흙을 퍼 부우며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이눔 자식아 발을 빗으만 빗다고 말을 해야지 이래 앉아 있으만 우옐라고!” 엄마의 호통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에 그제야 오빠는 울음을 터트렸고 엄마도 코를 함께 훌쩍이셨다. 그 다음 동생과 나는 자동. 엄마는 얼른 동생에겐 물주전자를 내게는 쑥을 뜯어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주전자의 물로 오빠의 발에서 흙을 씻어내고 쑥을 비벼 상처에 대고 지혈을 시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일로 인해 그 날의 길고 지겹던 벼베기는 일찍 끝을 냈다. 그리고 작은 오빠의 엄지발가락엔 다 커서까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글쎄 지금은 오빠의 맨발을 본 일이 없어 그 상처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 내게 낫은 더욱 무섭고, 조심해야 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요즘은 풀을 을 벨 때도 예초기로, 벼를 벨 때도 콤바인으로 하다보니 정작 낫을 사용하는 예는 극히 드물어 졌다. 이러다 그 무서운 낫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지게나 쟁기, 달구지, 도리깨, 홅대 등이 사라진 것처럼.

 온 봄과 여름, 가을 하늘바라기를 하던 벼도 눕는 계절 늦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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