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 겨울이 뽀얗게 내리면....

고 순 덕

 

고순덕
고순덕

힘없이 누운 가을의 끝자락 위에 겨울이 뽀얗게 내렸다. 나뭇가지와 먼 산엔 마치 눈이 온 것도 같다. 괜스레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섰던 마당에서 코끝을 한 방 얻어맞은 듯, 옷깃을 여미고 얼른 방으로 다시 들었다. 춥다. 한겨울보다 이렇게 겨울이 오려 할 때가 난 더 춥게 느껴진다.

 이런 계절에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할 즈음이면, 친구도 나도 앞머리가 허연 할매가 된다. 뽀송뽀송 잔머리에 서릿발이 성성하다. 아니 고드름같이 뻣뻣해진 머리가닥이 고개를 흔들면 회초리처럼 뺨을 때리기도 한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든 초겨울이 심통을 부리면, 아침 잠자리를 박차고 나오기가 공부하기보다 더 싫다. 엄마가 아무리 엉덩짝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모른 채 이불을 끌어 덮거나 “아이 쪼매만, 쪼매만 더 있다가......” 결국 이불 속에서 나를 탈피하게 하는 것은 소죽솥뚜껑 여는 소리! “드르르륵?” 둔탁한 무쇠솥 위에서 솥뚜껑이 밀려나는 소리가 나면, 구수한 여물내음이 문듬새로 스며든다.

 
 

 이제 아버지는 끓인 소죽을 한 동이 시죽통에 넣어 주고는 헛기침을 하며 방으로 들어오실 거다. 그리고는 “아직도 안인나고 뭐하노. 얼릉 안인나나!” 소리치며 얼음보다 찬 손을 내 이불속으로 밀어 넣겠지? 그러기 전에 일어나는게 상책이다. 이런 날에는 지난 밤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따신 물로 세수를 하면 좋겠지만, 작은 언니가 먼저 머리를 감고 첫 차로 간 날은 새로 올린 물이 아직 미지근하다. 그나마 스테인레스 대야에 한바가지 받아 샘까지도 가기 싫어 봉당에 앉아 씻다보면 물은 금방 서늘해진다. 자연히 ‘세수 할 때는 깨끗이 이 쪽, 저 쪽 목 닦고.....’ 노랫말과는 관계없이 고양이세수를 하게 된다. 며칠 이렇게 반복되고 나면 목과 얼굴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보여주게 마련이다. 세수를 마치고 방문을 열라치면 문고리에 손이 떡 들러붙어 놓아주지 않는다.

 
 

 찬바람이 칼바람되어 불면 장갑도 없는 맨손의 손등이 쩍쩍 갈라지고 피가 맺혔다. 그럴 때 아버지의 가장 좋은 선물은 구운 돌이다. 쇠죽을 끓이고 불씨가 남아있는 아궁이에 조약돌을 넣어 우리가 학교를 갈 때면 종이에 꽁꽁 싸서 손에 쥐어 주었다. 처음엔 조금 뜨겁던 돌이 동네를 벗어나고, 고개를 하나 넘으면 서서히 따뜻이 되고, 학교 가까이 가면 어느 틈엔가 다 식어 버려지고 빈 손만 새빨개져 있다. 학교 가까이 사는 친구들은 얼마나 좋을까? 늘 부러운 건 장터에 사는 친구들이었다. 빠트린 준비물고 얼른 가서 가져올 수 있고, 잊고 온 숙제도, 어떤 때는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는 친구도 있었다. 얄미운 녀석들. 그리고 중학생이 된 작은 오빠가 부러웠다.

 작은 오빠는 중학생이 되면서 자전거가 생겼다. 국민학교 때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키가 작아서 가랑이 사이로 타느라 삐딱삐딱 거리더니, 졸업할 즈음엔 키가 훌쩍 커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엘 갔다. 그래서 작은 오빠는 동생과 나보다 집에서 출발하는 시각이 더 늦어도 되었다. 그것만도 부러운데 어떤 때는 동네 언니들하고 노닥거리며 가다보면 자전거를 타고 쌩하고 옆을 지날 때면 얼마나 더 얄밉던지.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동생과 나를 앞뒤로 태우고 가거나, 가방을 실어다 주기도 했다. 동생은 오빠 앞에 안장과 핸들이 있는 파이프 위에 앉히고, 난 뒤에 태우고, 오빠는 힘에 겨운지 엉덩이를 안장에 대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들고 폐달을 밟았다. 오르막에서는 동생과 나를 태운 채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끌고 올랐다. 난 그 때 왜 내려서 함께 자전거를 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동생은 지금도 말한다. “오빠여서 그랬나? 오빠도 지금 생각하면 어린 아이였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다. 그렇게 오른 오르막을 지나, 내리막이 나오면 엉덩이에 불이 난다.

 울퉁불퉁 산길의 오르막과 내리막은 유난히 더 험했다. 그럴때는 내리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터덜거리는 소리와 ‘끼이익’하는 브레이크소리에 오를데로 올라버린 가속도까지, 내리고 싶다는 말은 손으로 뻗쳐 애궂은 오빠의 교복만 수난을 당한다. 동생은 무서움에 핸들을 꼬옥 힘주어 잡다가 손에 힘 빼라는 오빠의 호통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아침이 좋았다. 오빠의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갈 때면 지각도 않았고, 손끝 코끝이 칼로 도려내듯 시리고 아팠지만 친구들의 부러움에 으쓱할 수 있어 좋았다.

 점점 움직임이 줄어들고, 몸이 움추려지는 겨울이다. 그러기에 이웃과 가족의 따뜻한 정이 더욱 절실해지는 계절.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핫팩 대신 콩주머니를 만들어 전자렌지에 데워줘 볼까나? 그런데 그걸 들고 학교 갈 아이가 곁에 없다. 갑자기 찬바람이 옆구리를 스치는 기분이다. 얼른 다시 따뜻해질 수 있게 작은 오빠에게 그 때 고마웠다는 전화 한 통 넣어야 겠다.

저작권자 © 영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