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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장산과 와운[와목] 강용량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의 종가시리즈 8번째
변해철 편집국장  |  ynt@y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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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9  11: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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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장산과 와운[와목] 강용량

                                                                                               김정찬

   
▲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상주를 대표하는 산은 갑장산이다. 일명 연악산이다. 조선 중기부터 이 일대는 상주를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다. 재령강씨 때문이다. 남계 강응철은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우복 정경세와 더불어 ‘상산사호’로 불리면서, 갑장산 아래 지천 계곡을 ‘연악구곡’이라 명명하고, 그 일대에 연악서원을 무대로 왕성한 활동을 한 이후 이곳은 단순히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 아닌 학문의 공간과 시회의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남계 강응철의 아들 3명은 모두 벼슬을 하지 않으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인물이라서, 동춘당 송준길은 이 집안을 ‘사열사문’이라 칭송하였다. 이 집안의 둘째 아들인 와운 강용량은 지금의 갑장산 와목에 별장을 짓고 와목재라 이름을 붙이고 여러 문인들과 교유를 하였고, 상주의 효자와 열녀 이야기를 정리하여 ‘관감록’이라고 이름을 붙여 책을 펴냈다. 그의 평생 이력을 소개한다.

 강용량康用良은 재령강씨이다. 자字가 경우慶遇이고 호는 와운臥雲이다. 조부는 증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을 지낸 강사경이고 부친은 남계 강응철이다. 강응철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우복 정경세와 사귀면서 일명 상산사호로 불리었다. 이 분이 풍양조씨인 조수복의 딸과 결혼하여 무신년 3월 8일에 낙지정 아래에 있던 집에서 강용량을 낳았으니 남계 강응철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윤리도덕에 매진하여 인품이 탁월하였고 가정에서 시서詩書교육을 받아 문장실력이 일찍 성숙하였다. 부모를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모셨고 형제와 항상 우애의 가르침을 강마하였다. 관례를 치른 뒤쯤 명성이 원근에 자자하여 어른들이 모두 칭찬하였고 친구들인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여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없었으니 이것은 충직하고 신뢰의 언어를 구사하였고 독실하고 경건한 행동을 하여 친구들에게 신망을 얻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18세쯤에 다리가 붓는 병을 앓아 점점 악화되자 증조부께서는 차마 두고 보지 못하며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에게 “내가 이 대인 기상이 있는 아이를 잃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라 하였으니 공의 우뚝한 대인의 뜻이 이 한마디 말로 상상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몸을 항상 장중하게 하여 세상에 사표가 되었고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통달하고 성리학에 심취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문장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베껴내는 글은 흉내내지 않았다. 16세에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독실하게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일상의 행실로 삼았고 또한 힘든 일을 잘 견디며 부모 봉양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늘 약을 직접 끓이며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부모 병 수발 하는 것이 1년이나 2년씩 오래 지속되어도 기쁘게 임하여 밤낮으로 돌보고 간호하는 것을 하루에 온 정성을 쏟아 행하는 것처럼 하였다. 병세를 살피며 제문을 지어 오래 살 수 있도록 기원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여 “저렇게 훌륭한 효자는 하늘이 낳았고 큰 복이 이에 감응한다.”라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슬픔이 커 지극히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었고 선조를 모실 때는 예의를 다하고 묘를 관리할 때는 늘 그 때를 잃지 않았다. 종족을 대할 때는 화목한 마음을 다하고 친척을 대할 때는 진심과 넉넉한 마음을 다하였다. 늘 여동생이나 누님이 일찍 홀몸이 된 것을 슬프게 여겨 누님을 마치 어머님 대하 듯 하였고 여동생은 마치 자식 가르치듯이 은혜와 의리로 돌보아 끝까지 지켜주었다. 또한 조카들의 실수에는 신의로 인도하고 예의로 훈계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과 엄하게 가르치는 것을 병행하였다. 내외가 마음으로 따르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색이 얼굴에 늘 나타나 급하게 하는 말이나 짜증스런 말은 조금도 입밖에 담지 않았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비록 작아도 반드시 기뻐해주고 남의 잘못을 보면 비록 아무리 커도 묻어주었다. 형제와 집안 식구들이 70여 명에 이르렀으나 각자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한 집에서 같이 밥을 해서 먹이며 날마다 화목하게 지낸 것이 40여 년이나 되는데 옛날 사람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처럼 같이 지내며 잘 보살 핀 것은 여기에 더 이상 더할 만한 일이 없다.

 신해년에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전에 없이 심하게 되었는데 당시 정후량이 수영水營으로 있으면서 쌀을 60여 석이나 보내 왔을 때 친족들 가운데 급한 정도를 살펴 나누어 주고 이웃 동네에도 급한 사정을 보고 구휼하였으니 위급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하여 살 수 있게 한 그 높은 뜻이 어찌 옛 성인들이 급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일찍이 무고無故를 첫 번째 즐거움으로 삼아 매년 초에 술을 대접하며 서로 즐겼다. 불행하게도 병오년 봄에 동생을 잃은 후로는 동생의 생일을 맞이해서는 더욱 허무하고 슬픈 마음이 더해 자제들이 차마 술이나 맛 나는 음식을 진설하지 못하였었다. 친구의 죽음 소식이 전해오면 자제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슬퍼해 주었고, 국가의 기일을 맞이하면 꼭 의관을 갖추고 슬퍼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때 주위에서 연세도 높은데 그러시면 힘든다고 해도 “임금의 몸은 부친의 몸과 한가지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처신하는 것은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한다. 너희들도 이것은 지켜야 한다.”라 하였다. 일상생활의 처신에서 그 마땅함을 깨달아 느껴 미치는 바를 넉넉하게 따르니 그 누가 기쁘게 흠모하지 않겠는가? 또한 후학을 진작시키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았는데 갑진년에 통문을 내어 여러 집안의 명문 자네들을 예기와 소학 그리고 가례의절 등의 책으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 연악서원

 이 분의 호는 와운臥雲인데 일명 목촌牧村이라고도 한다. 한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유림의 어른으로 추대하였고 문장찬양은 일찍이 드러나 있는 것을 미세하게 살피고 숨어 있는 이치를 밝히는 뜻이 있고 고금의 유명한 분들과 충효절의 등의 내용을 논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관감록觀感錄을 저술하여 세상에 알렸는데 아랫사람을 부리는 때에는 언제나 후하게 접대하는 법도를 따랐고 상을 당한 경우에는 대신 조문을 하기도 하였다. 노비를 마치 집에 딸린 식구처럼 대하여 추우면 옷을 벗어 주고 더우면 곡식을 지급하여 먹였다. 사람들이 실수를 하면 타일러 의리로써 가르쳐 반드시 스스로 깨우치게 한 뒤에 그만 두니 아래 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감동하였다.

 돌아가시자 이웃에서 모여 곡을 하고 슬퍼한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친척들에게 하는 경우와 같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훌륭하신 모모 분께서 돌아가시니 우리들이 어찌 서로 조문하고 곡을 하지 않으리오?”라 하였다. 그 울음소리가 온 들판에 펴지니 어찌 어진 명성이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퍼진 경우가 아니겠는가? 묘를 쓰던 날에 여러 고을의 사림들이 모여 일을 돌보는 사람들이 수 백 여명에 이르렀으니 공의 심덕과 도학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된 것이 어떻게 이런가?

 평산신씨이고 호조좌랑이었던 신석무의 따님과 결혼하여 1녀 2남을 낳았다. 내외자손의 경우 60여 명이 된다. 병진년 11월 13일에 돌아가시자 무오년 10월 3일에 고을의 남쪽 초전에 있는 선영에 모셨다. 당시 나이 6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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