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華官職 未有食浮 김광엽

김 정 찬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김광엽金光燁의 자는 이회而晦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국초國初에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양경공襄景公인 휘 승주承霔의 6대손이다. 고조는 휘가 약균若均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승평군昇平君에 봉해졌으며, 행行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수홍粹洪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다. 조고는 휘가 순고舜皐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知中樞府事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선고는 휘가 침琛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행行 구령 병마만호仇寧兵馬萬戶를 지냈다. 비妣 숙인淑人 원씨元氏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을 지낸 원수장元壽長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 신유년(1561, 명종16) 8월 임오일에 태어났다. 5세 때 평양군에게 공부르 배웠다. 6세에는 효경을 배우고 8세에는 소학을 배웠다. 10세에는 구촌서당에서 대학을 읽었고 12세에는 갑정사에서 공부하였으며 13세에는 평양군을 모시고 서울에서 살았다. 14세 때에 평양군이 서울에서 돌아가셨는데 15세에 상주로 돌아와 백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16세에 백원에서 독서하였고 18세에 결혼하였다. 19세에 주역을 읽고 홍범구주도 같이 공부하였다. 20세에 해인사를 유람하였고 22세에 귀허집을 저술하였다. 28세에 풍기 은풍면 취곡으로 이사를 갔고 30세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으며, 장성함에 미쳐서는 글을 짓는 데 힘을 쏟아 과거 시험장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만력 경인년(1590, 선조23)에 생원시生員試에 일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문과文科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으로 들어갔다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겨졌다. 이로부터 아름다운 명성이 날로 성해져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저작著作이 되고 부수찬副修撰과 수찬修撰을 거치고 부교리副校理와 교리를 거치고 부응교副應敎를 거쳤다.

 간원諫院에 있으면서는 정언正言이 되고 헌납獻納이 되었다. 헌부憲府에 있으면서는 지평持平이 되고 집의執義가 되었다. 전조銓曹에 있으면서는 좌랑佐郞이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에서는 사유師儒가 되었으며, 곧바로 직강直講을 거치고 사예司藝를 거치고 사성司成을 거쳤다. 춘궁春宮에서 시강侍講하면서는 문학文學을 거치고 필선弼善을 거쳤다. 대시臺侍의 직에 출입한 것이 모두 15, 6년이었는데, 사람들이 식부食浮[덕에 비해 식록(食祿)이 너무 많다는 뜻으로, 관직에 비해 재능이 모자람을 뜻하는 말이다.]라고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 가을에 옥당의 직에 있던 중 황달을 앓아 수레에 실려서 시골로 돌아갔다가 11월 정사일에 풍기豐基의 취곡리翠谷里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5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다음 해에 가서산加棲山에 있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몸가짐을 겸손하고 신중하게 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화락하고 평안하게 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평탄하게 하여 일찍이 특별난 행동이나 날카로운 논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비是非가 판가름 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또한 구차스럽게 동조하거나 뜻을 굽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주제독尙州提督이 되었으며, 전조銓曹에 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어 나갔을 때에도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면서 말투와 안색에 조금도 불평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생토록 서책을 보아 경사經史를 두루 열람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서 초록抄錄하여 수십 권의 서책을 만들었다. 그 책들이 모두 이 세상에 간행할 만하였으나, 미처 업業을 끝내지 못하고 졸하고 말았다. 내가 듣건대 착한 행실을 하고서 보답을 받을 경우, 그 당대에 크게 받지 못하면 반드시 그 자손 대에 크게 받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마땅히 공의 후손들에게서 징험될 것이다.

 공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이인수李仁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경후慶後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진사 여희필呂姬弼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유학(幼學) 황유한(黃有漢)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하나이고 손녀는 셋이며, 외손자가 다섯이고 외손녀가 넷인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醇者質 / 순후한 것은 공이 지닌 자질이었고

淑者性 / 맑은 것은 공이 지닌 성품이었네

遜者言 / 공손한 것은 공이 하는 말투였었고

勉者行 / 힘쓰는 것은 공이 하는 행실이었네

然而不祿 / 그런데도 큰 복록을 못 누렸나니

奈何命 / 명이 또한 그런 것을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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