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먹거리

고 순 덕

고순덕
고순덕

 올해 크리스마스카드 몇 장이나 받으셨나요? 그럼 반대로 몇 장이나 쓰셨나요? 저는 군에 있는 아들 녀석에게 한 장 써 보내야지 생각만 하다가 시기를 넘기고 말았다. 그러니 물론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온 카드 또한 없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건조한 삶이 된 건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낯간지러운 말들을 채운 카드를 썼었는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선물꾸러미도 카드도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는 카드도 봉투도 직접 그리고, 접어 만들어 썼던 기억이 있다. 한 때는 카드를 만들어 장사를 할 생각도 했었다. 아주 우서운 그림솜씨를 가지고 말이다. 내가 그리는 크리스마스카드의 그림엔 늘 포인세티아 잎을 단 종과 별, 그리고 싸리 울타리가 있는 초가를 그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난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싸리 울타리 안으로 빗자루 자욱이 있는 눈 쌓인 마당. 그런 그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했다.

 
 

 옛 우리 집과 닮은 모습이어서 그랬을까? 사실 우리 집이 초가였을 때의 기억은 없다. 다만 마당가에 겨울이면 움집이 담 밑에 세워져 있었던 것은 생각이 난다. 그건 바로 김치의 집. 엄마가 장장 3일에 거쳐 김장김치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마당 한켠에 땅을 파고 큰 항아리를 묻었다. 그리고 장대를 서로 기대어 세우고 짚으로 엮은 이엉을 둘렀다. 빛이 잘 드는 반대쪽 마당 짚가래 아래엔 무 구덩이를 파고, 겨우내 먹을 무들을 묻었다.

 
 

 눈 온 아침 제일 하기싫은 심부름은 움집에 가서 김치 꺼내오기. 고무장갑도 귀하던 그 때 눈으로 덮인 마당을 가로질러 차디찬 장독뚜껑을 열고, 김치를 꺼낸 맨손은 김치국물이 아니더라도 금방 빨갛게 얼어 버렸다. 땅에 묻은 항아리에서 막 꺼내 두툼한 나무 칼도마 위에서 숭덩숭덩 썬 시원한 겨울 김치의 맛이란...... 특별한 반찬 없이 갓 지은 밥에 이 김치만 있어도 너무나 맛있던 두리반위의 식사시간. 안방이 비좁도록 많았던 형제들 탓에 더 맛있었던 걸까? 참외나 수박이 여름 서릿거리였다면 겨울 서릿거리는 무였다.

 입이 궁금하던 긴긴 겨울밤, 또래의 아이들은 골방에 모여 도둑잡기도 하고, 전기놀이도 하면서 배가 고프면 윗목에 대발로 둘러쳐져 들어 앉아있는 생고구마도 깍아 먹고, 무서리도 했다. 무는 그냥 먹으면 시원하고도 아렸지만 살짝 데쳐 무전을 부쳐 뜨끈할 때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음~~~~. 그리고 윗목 시렁에 걸린 메주의 콩알 빼 먹기는 또 얼마나 고소하고 재미있는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맛이다.

 
 
 
 

 

 

 

 

 

 

 종일 가마솥에 푸욱 삶아진 콩을 빻을 때 요리조리 잘도 피해 형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콩알이 공격의 대상인데, 메주가 꾸덕꾸덕 말랐을 때 손톱이나 젓가락을 이용해 잘 파내야지 그렇지 않고 메주 귀퉁이라도 날아가면 엄마한테 등짝을 내어 놓아야 했다. 다락에는 옥수수나 보리쌀을 튀운 튀밥이 있었고, 처마 밑에는 곶감과 씨레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꼬물꼬물 3~4학년만 되어도 계집아이들은 엄마 몰래 밀가루를 개어 김치전에 배추전, 호떡도 구워 먹었다. 아궁이에 넣어 두고 깜빡 잊은 고구마는 숯덩이가 되어 나의 얼굴도 검둥이로 만들어 주었고, 뭐니뭐니해도 젤 달콤한 것은 그 귀하디귀한 설탕을 국자에 녹여 소다 살짝, 휘휘 저어 부풀린 달고나가 최고였다. 그 맘 때 이보다 더 달고 맛있었던게 있었을까? 하지만 이 달고나는 두 가지의 부작용이 있었는데 하나는 달아오른 쇠젓가락에 묻은 달고나를 쪽 빨아 먹다가 혓바닥을 데이고, 국자를 시커멓게 태워 잘 닦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한테 들키는 날에는 또 한 번 등짝을 내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떠랴 아픔은 잠시고, 내일은 친구 집에 가서 또 해 먹으면 되니까....

 겨울이면 엄마는 씨레기국이나 선지국, 갱시기를 자주 끓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올라치면 시어 꼬부라진 김치양념을 씻어내고 날콩가루를 흩뿌리고 김치국을 끓였는데, 어린 눈에는 계란을 풀어 놓은 것 같아 보이고 구수한 맛이나 즐겨 먹었던 기억이 있다. 김치가 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념한 김치 위를 덮었던 절인 배추들도 이 맘 때면 새콤새콤 짭쪼롬하니 맛이 들어, 총총 썰어서 참기름 한 방울에 버무려 밥을 비벼 먹으면 쿰쿰한 냄새인지 맛인지 거슬리는 듯 맛이 있었다. 삶은 고구마에 살얼음 낀 동치미 한사발이면 긴긴 겨울밤 허기도 무섭지 않았다. 처마에 달린 고드름도 먹거리였던 그 시절.

 
 

 가난했던 어린시절 겨울에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먹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 배는 고프지 않은데 입이 심심해 뭐든 먹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면 처음엔 안 돼, 안 돼 하며 참다 결국 야밤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찾아 입을 채우고는 후회를 한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친구 왈 “가시나야 그건 니가 배가 고픈기 아이고, 맘이 고픈기라.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난도 요새는 자꾸 막 먹어여. 와작와작 소리가 나기 깨물어 먹는 거를 머그만 스트레스가 날라 가는 거 안것나? 난 그렇던데......” 나도 그래.

 요즘 음식은 푸짐하고 맛은 있는데 왜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걸까? 궁하지 않아서일까? 아니 정이 없어서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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