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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사노, 효자 김언건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의 종가시리즈 11번째
변해철 편집국장  |  ynt@y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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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6  09: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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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사노, 효자 김언건

 

   
▲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옛날에 행실이 독실한 군자 운정(芸亭) 김 선생의 묘가 상주(尙州)의 산천 감좌(坎坐)를 등진 언덕에 있다. 명망있는 자손인 상사(上舍) 김광철(金光澈)이 나에게 “선조의 묘갈명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집안에 일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잘 생각해 주십시오.”라 부탁하였다. 내가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자, 또 말하기를 “그대가 한마디 써 주지 않는다면 선조의 묘에는 영원히 묘갈명이 없게 될 것이니, 훗날 지하에서 선조를 뵐 면목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대가 끝내 잘 도모해 주십시오.” 라 하여, 내가 감히 글을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은 휘가 언건(彦健)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영산(永山[영동]) 김씨이다. 그 선조는 신라 왕족의 후예이다. 판도사 판서(判圖司判書) 김길원(金吉元)과 우찬성 김종경(金宗敬), 영의정 김훈(金訓)이 3대를 이어 고려 말과 조선 초 때에 크게 현달하였는데, 이 분들은 공에게는 4대가 넘어가는 조상이 된다. 증조 김민(金旼)은 형조 좌랑을 지냈고, 조부 김공저(金公著)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선고 김자(金滋)는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선비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규내의 법도가 있기로 유명하였는데, 명종(明宗)이 그 집안의 부역을 면제하도록 명하고 ‘효열의인(孝烈宜人)’이라는 호칭을 하사하였다.

   
악서원(淵嶽書院) 소 재 지: 경상북도 상주시 지천동

 공은 어려서부터 착한 성품을 지녔는데 8세에 아버지를 여의자, 무덤에서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여 추위나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아, 듣는 사람들 또한 눈물을 흘렸다. 성장하여서는 마을의 명망있는 선비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자세히 묻고 깊이 생각하여 더러 스승의 견해를 뛰어넘기도 하였다. 노소재(盧穌齋), 김후계(金后溪), 임갈천(林葛川) 등 여러 현인들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경자년(1540, 중종3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마침내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였다. 대부인을 봉양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안색을 살펴 모시고 뜻을 따랐다. 부인이 일찍이 병중에 노루 고기를 드시고 싶어 하자, 공이 직접 뛰어다니며 두루 찾을 때, 갑자기 노루가 저절로 그물에 걸려들게 되어, 잡아서 반찬으로 올렸다. 세시(歲時)마다 대부인을 위하여 생신을 축하할 때, 자손들이 술잔을 올리고 번갈아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니 화기가 훈훈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부인처럼 장수하고 복 받자, 자기 어버이에게 축원하고, 공처럼 효도하기를 자기 자식에게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대부인이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시자 공은 나이가 이미 50살이 넘었는데도 오히려 상례를 지키면서 지나치게 슬퍼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비가 많이 오자 공은 장사를 잘 마치지 못할것이 두려워 밖에 서서 정성으로 기도하며 곡성을 그치지 않자, 하관하려고 할 때 비가 그쳤다. 이윽고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전(奠)을 올리고 손님에게 절하는데, 곡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흘러 내렸다. 기일(忌日)이 되면 육아편(蓼莪篇)[시경의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다룬 편]을 세 번씩 반복해 외워 슬픔과 애통함은 남들을 감동시켰다. 이에 향리에서 이것을 본받아 행실이 돈독하다고 이름난 사람도 있었다.

 공이 젊어서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일찍이 태학에서 공부할 때에 이량(李樑)[효령대군의 5대손, 정사룡의 문인]이 국정을 쥐고 세력을 크게 떨쳐 공을 끌어들이고자 했지만, 공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먼 친척 중에 부모를 여의고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보살펴 키워 성취시켜 주었다. 다른 사람과 말할 때에는 성의가 미덥고 분명하여 완악하고 사나운 사람도 감복하였으며 포악하고 오만한 사람 또한 성품을 바꾸었다.

   
▲ 연악서원 현판

 신미년(1571, 선조4) 9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였다. 후에 방백이 그 행적을 기록하여 조정에 아뢰니, 승훈랑(承訓郞)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연악서원에 제향하였다. 공의 부인은 풍양조씨(豐壤趙氏)로 참봉 조이(趙恞)의 따님이자, 검상(檢詳) 조서정(趙瑞廷)의 손녀이다. 돌아가신 뒤에 공의 묘소 바로 옆에 묘를 썼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각(覺)은 현감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고, 차남은 학(學)이다. 장남 승지공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참봉 지백(知白), 첨정 지절(知節), 지덕(知德), 장령 지복(知復)이다. 딸은 주부 강진립(康震立)에게 시집갔다. 차남 학의 두 딸은 장여순(張汝恂), 이원(李謜)에게 시집갔다. 증손, 현손과 5대손, 6대손은 매우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돌아가신 지 195년이 지났는데 전쟁을 거듭 겪어 문적이 흩어져 겨우 몇 수의 시만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다. 뜻 깊은 말씀과 아름다운 덕행이 대부분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그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자면, 근본이 확립되어 도가 빛나며 실행이 축적되어 미더움이 통하니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저절로 분발심을 느끼게 한다. 이러므로 선생의 말 없는 가르침이 무궁한 것이니, 또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백행의 근원은 효라 하니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네

말세의 풍속은 거짓만 늘어

본성을 다하는 이 드물다네

아, 아름다운 우리 공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였다네

어려서는 지극한 행실 있었고

자라서는 묻고 배우길 좋아했다네

증자처럼 어버이 뜻 봉양하고

왕상처럼 기이한 응험 있었다네

아름다운 이름 널리 퍼져

조정이 기리어 증직을 하사했다네

드높은 덕행을 우러러 받들어

백년 후에도 유풍에 감화된다네

그윽한 연악산에

그 사당이 맑고도 고요하구나

우뚝한 4척 봉분 있으니

그 묘도 비석에 명이 있다네

공의 이름 사라지지 않고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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