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남이의 삶을 산 귀남언니

고 순 덕

 

 추억의 드라마 “아들과 딸”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인 귀남이와 후남이. 그리고 아들 귀남이가 귀한만큼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후남이를 기억하십니까? 나와 여덟살 차이, 작은언니의 이름이 ‘귀남’이다. 귀한 아들이어서 귀남이가 아니라 귀한 아들 동생을 보라는 의미의 귀남이! 그래서인지 언니 아래엔 듬직한 아들, 작은 오빠가 태어났다. 제일 예쁘다는 셋째 딸로 태어났지만 육남매의 둘째딸로 자라야 했던 작은언니는 후남이 인생을 살았다. 덩치가 작아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를 가지도 못하고 다음해에 입학을 해야 할 정도로 작고 약했지만, 들일로 바쁜 엄마의 일손을 도와 덩치 큰 작은오빠와 울보인 나, 동생까지 업어 키웠다고 했다.

 
 

 큰언니가 있기는 했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취직을 해 나갔기에, 작은언니는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이미 밥을 해 먹고 학교를 다녔다. 내가 기억하는 언니의 모습은 늘 부엌에 있거나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온가족 밥과 우리들 도시락까지 싸두고, 교복을 챙겨 입던 언니는 부엌떼기의 모습은 없고 늘 단정하고 깔끔했다. 하복은 매일 조물조물 잉크물을 풀어 푸른빛이 감돌게 해 더욱 깨끗해 보였고, 동복의 칼라는 매일 빨고, 다려 새로 달았다. 특히나 작은언니의 여고 교복은 퍼프소매에 허리까지 조여매어 더욱 여성스럽고 예뻐 얼마나 입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니는 늘 아침을 부뚜막에서 급하게 밥을 챙겨 먹고, 동차(아침 7:40분 동대구행 두냥짜리 열차)를 타고 점촌시내에 있는 학교에 가기위해 동동 거렸다.

 
 

 그 즈음 난 국민학교 1,2학년. 그 때까지도 왜 그리 울 일이 많았는지? 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늘 울곤하는 울보였다. 어느 늦은 저녁, 고작해야 9시도 안되었지만 어린 내겐 일일계획표를 지켜야 하는 취침시간 이었다. 숙제는 덜 했고 잠도 오는데 또 울음보가 터져 징징거리다 아버지께 한소리 듣고 훌쩍였다. 작은언니가 내일 아침 일찍 깨워 줄테니 자라 했고, 꼭 깨워 달라는 약속을 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머리맡에 둔 공책을 보니 어머나 숙제가 다 되어 있었다. 뿌시시 얼떨떨한 목소리로 작은 언니를 찾았더니 언니는 벌써 부엌에서 가마솥을 열며, 빨랑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라며 가시 도친 소리를 낸다. 얼마나 기쁘던지. 그 날 후 꾀가 나서 몇 차례 더 숙제를 않고 징징거리다 잠이 들었지만 언니는 숙제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 난 더 징징거리며 밀린 숙제를 해야 했다. 언제쯤인지? 왜인지? 그리고 정확한 기억인지 모든 것이 모호한 기억 하나. 언젠가 작은언니가 집을 나갔는데 엄마,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시각 집으로 돌아와 고구마를 삶아 먹고 장독대 위에 말려 둔 일이 있었다. 학교에 다녀와 꾸덕꾸덕 마른 고구마를 발견, 십리를 걸어온 줄인 속에 먹으니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그 후로 말린 고구마를 먹고 싶어 작은언니가 또 집을 나가길 기도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 집의 큰 일, 모내기라던가 벼베기, 타작 같은 것들은 모두 언니가 학교를 가지 않는 일요일이나 가정실습 때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작은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되어 서울로 떠날 때 마을 어른들은 “저 집에 상머슴이 나가면 인제 저 집일은 누가 하노?” 할 정도였다. 도시로 나가 금방 어른이 된 작은언니는 휴가때면 부모님의 선물과 동생 삼남매의 옷들을 바리바리 사 가지고 왔다.

 지금도 젤 기억에 남는 것은 동생과 세트로 사 준 3단 원피스와 구두. 작은언니는 자신도 멋쟁이였지만 촌놈인 우리까지 멋쟁이로 변신시켜 주었다. 동생과 나는 그 옷을 얼마나 좋아하고 오랫동안 입었는지, 그도 그럴것이 그 때는 기본 첫 해엔 크게, 다음해엔 딱 맞게, 3년차엔 조금 작게 옷을 입는게 기본이었으니 최소 3년은 줄기차게 그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런 작은언니는 백마탄 왕자님을 만났지만 연애결혼이 흔하지 않던 그 때, 더욱이 보수적인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엔 무척이나 힘이 들었고 그 벌로 혼수를 잘 챙겨가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한이 되었던지 언니는 10년 후 나의 결혼 때에 한풀이를 했다. 결혼 일주일 전까지 직장을 다녔던 나는 예단과 혼수준비를 모두 작은언니가 도맡아 해 주었다. 냉장고, 세탁기, 식기, 이불, 옷장 등등 모든 것을 언니가 살림을 해 본 결과 장단점을 파악하고, 경제적이고 꼼꼼하게 챙겼는데, 처음 살림살이를 들이는 날 시어머니는 “너들 어데서 살다왔나? 뭐하나 빠진기 없노?” 하셨다. 심지어 당장 써야 할 휴지에 수세미 퐁퐁까지 언니는 정말 꼼꼼히도 챙겨 주었다.

 
 
 
 

 

 

 

 

 

 

 

 

 봉숭아물들이기를 좋아하고, 여전히 살림꾼인 작은언니는 어릴적 나에겐 엄마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주부로 짬짬이 살림의 꿀팁을 전수해 주며, 속 다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담사가 되어 준다. 작지만 마음씀이 큰 작은언니. 언니의 셋째딸자리를 대신 차지한 내 삶이 늘 사랑받고 살 수 있는 것은 어쩜 모두 언니의 양보와 희생 덕분이 아닌가 싶네. 언제나 고마워 작은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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