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엔 적

고 순 덕

  종일 촉촉이 내리는 봄비가 한껏 올라간 기온도 함께 끌어 내렸다. 춥다는 표현이 조금 머슥하지만, 얇은 스웨터 안으로 스며드는 비바람이 차갑다. 이런 날은 자글자글 빗소리와 비슷한 튀김요리나 전이 최고다. 구미당기는 소리와 따뜻함!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돌고 스르르 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오늘 같은 봄날엔 부추전이 딱이다. 가루는 조금만 넣고, 기름은 넉넉히 그리고 얄팍하니 지저 낸 전 한 장이면 비오는 날 중첩된 월요병은 쉽게 날려 버릴 수 있다.

 
 

 내 사는 곳에서는 전, 부침개를 적, 또는 적쪼가리라고 표현을 한다. 엄마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들일을 할 수 없어, 어느 한 집에 모여 적을 구워 먹기도 하고, 동양화 맞추기에 동전들이 오가기도 했다. 주로 모이는 곳은 두부기계가 있던 “민장아지매”네 였다. 어른께서 면장을 지내서 민장아지매란 택호를 얻으셨는지 그에 대한 얘기는 들은 바 없어 모르지만, 어쨌건 앞집의 앞집으로 기와집의 크기나 아지매의 등치나 포스는 면장댁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커다란 대문간 옆에는 두부공장(큰 규모의 공장은 아니고 그저 콩가는 기계가 있고, 두부만드는 곳)이 있고, 사랑채엔 커다랗고 덩그러니 높은 마루에 밀창(미닫이유리창문)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안채 부엌엔 가마솥이 세 개나 걸쳐 있었고, 요즘 왠만한 집 거실과 주방을 합한 것보다 컸다. 그런 민장아지매네는 언제나 사람들이 끈이지 않고 붐볐는데, 엄마는 주로 비오는 날에 아지매네로 놀러를 갔다. 요맘때면 부추에 가죽을 넣어 고추장반죽에 버무려 구운 장떡을 부쳤는데 어린 나에게 가죽 특유의 향은 정말이지 싫었다. 적쪼가리는 먹고 싶은데 냄새는 싫고, 결국 우린 우리대로 모여 허연 밀가루 반죽에 사카린 하나 녹여 구워 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때엔 열 살 남짓만 되어도 제 군것질꺼리는 스스로 조리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먹을 것이 흔하지 않은 때이고, 무엇이던 아껴야하는 넉넉지 않던 시절이기에 이렇게 밀가루나 먹거리들을 축내면 뒤따르는 아버지의 불호령이나 엄마의 잔소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모여 연탄이나 석유곤로 위에 지글지글 적을 굽고 먹는 그 순간만큼은 더없는 행복이었다.

 
 

 장마가 긴 여름날이면 역시 부추에 채썬 매운 풋고추와 차지개(방아잎)를 넣고 적을 굽거나, 풋고추의 배를 갈라 반죽을 입혀 구운 고추전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이도 어린 나의 입에는 적 한젓가락에 물 한 컵. 먹을게 못되었다. 그러면 작은언니는 커다란 오봉에 굵은 양대(강낭콩)를 듬성듬성 넣은 빵을 쪄 주었다. 가을이면 쪽파적, 배추적, 겨울이면 무시(무)적에 김치적, 그 외에도 쑥전, 진달래화전, 박잎전, 호박전 등등 계절마다 각기 다른 재료의 적들로 시골의 인심은 후하기도 하다.

 
 

 그리고 지역마다 적의 특색도 있다. 바닷가에는 어전이 서울 경기지역엔 나물새보다는 밀가루의 비율이 더 많은 전을 부쳐 먹는다. 어려서 보고 자란 것이 늘 무적에 배추적이었는데 언젠가 서울에 가서 포장마차의 빈대떡이란 걸 먹어보았다. 밀가루 전 위에 시금치 한 두 잎을 얹어 부친 것으로 엄마가 해 주던 나물 그득한 적쪼가리와 다른 형태여서 신기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만들어 먹던 밀가루적 생각도 나고, 어린 입맛이라 그런지 기름기 가득한 그 맛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어른. 부추전에 청량고추 송송 다져넣는 것은 기본 슬슬 올라오는 가죽이나 쑥도 함께 버무려 넣은 적 생각이 절로 난다.

 결혼 26년차 처음엔 제사던 명절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콩나물을 다듬고, 무를 깍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니 애나 울리지 않고 숙모님이나 형님의 일을 방해하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도 언제부터인가 적을 굽는 큰 전기프라이팬을 차지했다. 배추전, 파전, 부추전을 기본 동태전에 동그랑땡, 산적, 꽂이, 생선구이까지. 음식 간을 잘 못하는 나는 어디를 가도 음식조리에는 뒷걸음질을 한다. 하지만 전을 부치는 일에는 팔을 걷어붙이며 자신감을 내 보인다. 이는 모두 다년간 제사적을 부친 내공 덕분이다.

 봄비 내려 기온도 함께 내려가 힘들고 지치는 날, 지글지글 고소한 기름냄새 가득 바삭한 전으로 재충전 함 해 보셔요. 우리 엄마가 늘 그러셨거든요. “내 손이 내 딸이다!” 누가 해 주는 것도 좋지만, 기대 했다가 실망 마시고 내가 먼저 행복을 반죽해 지지고, 사랑하는 이를 초대하는 건 어떨까요?

비가 오는 날엔 역이 적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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