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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지역 최초 의병인 상의병 대장 석천 김각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의 종가시리즈 12번째
변해철 편집국장  |  ynt@y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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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04  09: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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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지역 최초 의병인 상의병 대장 석천 김각

 

   
▲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효성이 뛰어났던 상산사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운정 김언건의 아들, 임진왜란 때 외남을 기반으로 한 상주의 의병이라는 의미의 '상의병'. 그 의병의 대장, 15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 초중반까지 상주인물의 르네상스 시대일 때,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던 창석 이준의 스승 이었던 분이 바로 석천 김각이다.  지금도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상황을 기록한 '임진창의록'이 전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한 석천 김각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석천 김공께서는 만력 경술년 1월 26일에 산천이 있는 옛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나간 봄에 그 아들 영천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의 나무는 벌써 한 아름 정도로 컸는데 비석은 새기지 못했네. 그래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묘비를 부탁하네.”라 했다. 나는 석천 선생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금은 나도 늙었다. 끝내 보답하지 못했으니 선생님의 의지와 행동이 귀와 눈에 젖어든 바를 기술하기 위해 찾아왔으니 이것은 다만 꼭 해야 할 일인데 어찌 감히 글 쓰는 것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살펴보니 선생의 선조는 신라시대 경순왕에서부터 출발되어 공덕으로 영동에 봉해졌고 자손들이 그대로 그곳에 살았다. 그 후세에 이름이 길원이라는 분은 고려시대에 벼슬을 하여 판도판서에 이르렀다. 이분부터 높은 벼슬을 하고 세상에 드러난 분들은 모두 영산김씨 세보에 실려 있다. 5대조는 이름이 수화라는 분인데 벼슬은 형조참의에 이르렀고 참의를 지낸 김장이라는 분의 따님과 혼인하여 부부[난봉鸞鳳]의 인연으로 상주에 옮겨와 살게 되었다. 고조는 이름이 민이라는 분인데 형조좌랑을 지냈다. 증조부는 공저라는 분인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부는 이름이 자滋인데 벼슬하지 않았고 부인은 흥양이씨인데 조정에 효성과 절의가 보고되어 호역戶役을 면제 받았다. 부친은 언건이라는 분인데 진사를 지냈고 호는 운정이다. 후덕하고 독실한 행동으로 후계 김범이라는 분에게 높이 평가를 받아 은거하시며 학도들을 가르켜 지금 우리 지역이 고상하고 뛰어나게 된 것은 이 분의 공이 많다. 풍양조씨인 조이라는 분의 따님과 혼인하여 석천 선생을 낳으셨다.

 공은 집에서 학문을 배워 마음이 추구하는 바가 바르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문헌이 뛰어난 여러 분들을 따라 교유하시어 실천하는 행동은 모두가 법도에 맞았고 문장도 뛰어나 매번 과장과 기예를 겨루는 경우에 문득 선두에 들었다. 정묘년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얼마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이 법에 넘게 하였었다. 이때부터 과거시험은 포기하고 낙동강변에 집을 하나 짓고 흥이 나면 낚시를 하였으니 인간 풍모가 높고 시원스러웠으며 일 처리는 시원스럽게 처리하여 급한 경우에도 게으른 면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시절이 황량한 흉년이 되면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시며 여러 친족들에게 그것을 도모하고 약간의 곡식을 출연하여 조곡의 본전 쌀을 마련하여 걱정꺼리가 없게 하셨다. 임진년 여름에 왜적에게 상주지역이 함락되어 강한 사람들은 모여 도적이 되고 약한 사람은 풀숲으로 숨게 되었는데 공은 의병을 모집하고 거느려 여러 고을의 일본 사람들의 앞잡이가 되어 어지럽게 한 사람들을 먼저 처치하고 부대의 무사들을 분산하여 적의 요충지를 차단하여 종종 접전을 하니 왜적들이 함부로 약탈하지 못하였다.

 상주지역이 모두 이에 힘입어 안정되자 조정에서 그 사실을 가상하게 여겨 사온서주부 벼슬을 내리셨다. 가을에 함창현감 자리가 비게 되자 순찰사께서 공에게 함창현의 업무를 맡기셨지만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선무공훈으로 봉정의 자리에 올라 직급이 낮은 군자감정을 맡으셨다. 계사년 봄에 모친상을 당하여 쇠약한 나이에 곤경한 처지가 되어서도 상례를 집행하는데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곤란할 것으로 생각했다. 상을 마치고 용궁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때 임금을 호위하는 군대가 용궁현 내에 주둔하였는데 전쟁에 관한 일이 더 심하게 되었다. 공께서는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힘든 일을 다스려 마침내 주민들을 어려운 상황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 임기가 덜 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냇가에 붙은 곳에서 밭일을 하며 화초류를 심고 계절마다 친한 분들을 초청하여 모이며 그 곳에서 지냈다. 흰 머리와 눈썹이 훤하여 마치 그림 속의 사람 같았다. 자손들이 빙둘러 모시고 번갈아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위하니 고을 사람들이 청아하고 한가하게 사는 복이 깃들었다고 하였다.

 아, 공은 벼슬하기 전부터 사물에 이로움을 주는 것에 뜻을 두고 넘치게 쌓아 흉년의 기근을 막았으니 그 견해가 높고 크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적을 만나 아득한 하나의 서생으로서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큰 난리를 겪으면서 계획을 세워 싸움에 나아가 군인들 보다 더 노련한 것은 평소에 마음에 품은 바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임진왜란이 조금 안정되어 득실의 자리에서 벗어나 숲이 있는 동산으로 돌아와 편히 지내며 끝을 잘 마치므로 시작이 있게 하였으니 훗날 사람들이 공의 뜻과 행동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이 사실에서 찾아볼 수가 있을 뿐이다.

 공의 이름은 김각이고 자는 경성이며 부인은 상산김씨인데 성균사성을 지낸 김충이라는 분의 따님이다. 법도가 있는 집안 출신으로 규방의 법도가 있었고 여자로서의 행실을 갖추어 으뜸으로 칭송된 분이다. 공 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같은 무덤에 장례를 치렀다. 맏아들은 김지백인데 동부참봉을 지냈으나 일찍 죽었다. 둘째는 김지절인데 선공첨정을 지냈다. 김지덕은 수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김지복은 대과에 급제하여 큰 기대를 받았다. 조정의 반열에서 근무하며 그 직분을 다했고, 군절제사를 주어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도록 힘쓰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공께서 가르치고 심어 주었었기 때문이었다. 딸은 강진립에게 시집을 갔다. 김지절은 현감을 지낸 강우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름은 적이고 사평을 지냈다. 김지덕은 주명신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열, 김형, 김구의 세 아들을 두었다. 세 딸은 첨지를 지낸 이용길, 학생 신분인 송시준, 박사 신분인 서희조에게 시집을 갔다. 김지복은 직장을 지낸 전개라는 분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들은 하나인데 김료이고 진사를 지냈다. 강진립은 아들 하나가 있는데 강택룡이다. 자손이 번창하여 덕이 있는 집안의 자손들의 경사가 한창 무르익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신도비명은 다음과 같다.

   
▲ 석천집

 

왜적이 난리를 일으켜

백성들이 큰 가마에 빠지게 되었다

군자가 없었다면

그 누가 그 환란을 구휼했겠는가?

임금께서 그 공적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이렇게 어진 명령을 내리셨도다

백리 고을을 맡아

정치는 평안하고 간결하게 하시었다

마침내 그만 둘 생각으로

초야에서 화목하게 지냈다네

표창은 비록 인색했지만

베풀지는 못해도 계산은 멀리 하셨다네

자손이 있어

선조의 업적이 더욱 빛난다

생각하니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 옛날 어릴 때부터였지요

훈육하고 가르쳐 주셨는데

자는 듯 하여 외쳐 봅니다

이 언덕에 누워 계시는군요

세월이 바뀌었습니다

당우처럼 높게 봉분이 쌓였으니

묘비명을 이렇게 씁니다

그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은

산처럼 높은 기상 공경할 것입니다

 

숭정 5년 임신년 3월 며칠 문인 통정대부 전 승정원 우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이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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