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는 날

고 순 덕

 

 지난 주말 질녀가 결혼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작은오빠의 큰 딸이. 나와 생일이 같고,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아이가 어른이 되는 날! 가족, 친지는 물론 양가 혼주의 지인과 신랑, 신부의 벗들까지 예식장이 북적였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은 옛 생각들로 북적였다.

 
 

 큰언니가 시집가던 날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마당에 와 적을 굽고, 손에는 달걀이며, 쌀, 콩, 그리고 현금을 몇 백원씩 가져오는 분도 계셨다. 엄마는 정지(부엌)와 샘, 마당을 바쁘게 오갔고, 집 안은 물론 마당에 깔아 둔 멍석위에선 국수를 앞에 두고 술판이 벌어졌다. 큰집 큰아버지와 큰엄마, 부산 작은아버지 가족, 서울, 대구, 부산에 사는 아버지만큼이나 어른인 사촌오빠 내외들도 모두모두 모였다. 작은오빠는 큰언니가 시집을 간다는 얘기를 누구한테 어떻게 들었는지 변소(화장실) 옆에 있는 감나무 밑에서 누나 시집가지 말라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누가 작은오빠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낯선 한 남자가 누나를 빼앗아가는 것이라 알려 주었나보다. 그렇게 큰언니의 결혼과 작은오빠의 인연은 처음부터 어긋났고, 결혼식 당일에도 오빠는 눈물을 보여야 했다. 큰언니의 결혼식은 시댁이 있는 예천에서 했는데 아침 일찍부터 온 집안의 가족과 마을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나도 나름 제일 예쁜 옷을 입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작은오빠는 큰언니가 사 준 츄리링(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섰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그리고 허리에서 발목까지 하얀 두 줄이 서 있는...... 예식을 마치고 예약해 둔 실비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작은오빠는 잠시 한눈을 팔다 가족의 무리와 떨어지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식당을 찾았다. 하지만 식당 주인이 오빠를 잡고 식당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를 않았다. 이제 정말 누나를 빼앗긴다는 설움과 길을 잃고 배고픔까지 오빠는 눈물, 콧물을 훔치느라 얼굴은 꼬질꼬질 했고 식당 주인은 “우리 누나 결혼식이라요. 들어가야 되요. 우리 엄마, 아부지가 식당이 여라 캤어요.”라고 강하게 어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빠의 눈물은 멈추질 않았고, 식당주인은 그런 오빠를 몰래 밥 얻어 먹으러 온 거지로 대했다고 한다. 결국 늦게 오신 마을 어른이 주인에게 혼주의 아들임을 확인시키고서야 오빠는 식당에 들어 올 수가 있었다.

 
 

 큰언니의 결혼식과 연관된 에피소드는 동생에게도 있다. 당시 다섯 살이던 동생은 결혼식장엔 함께 가지 못했다. 누나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슬픔에 빠진 작은오빠와는 달리 동생과 나는 집에 손님이 많이 오고, 맛있는 음식이 많다는 것이 마냥 좋았던 것 같다. 특히나 동생은 “막내처제 막내처제요!”라고 부르는 키가 크고 양복을 입은 잘생긴 형부가 더 좋았던 걸까? 언니가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형부가 우리 집에서 잠을 자던 첫날, 동생은 두 신혼부부의 사이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아뿔싸! 전날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동생은 새 솜이불에 지도를 그리고 말았다. 어린 맘에도 무안했던지 아침 일찍 엄마에게로 와 “엄마 형부가 오줌 쌌어.”라고 귀에다 속삭였단다. 본인은 정작 기억도 하지 못하는 이 이야기는 지금껏 형부와 큰언니가 동생을 놀려먹는 얘기꺼리고, 이번 질녀의 결혼 날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내가 시집오던 날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셨다. ‘아부지는 아직도 우리 결혼이 못마땅 한가?’ 당시엔 서운한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 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된 지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장난하듯 “오빠야 은비 시집가는 날 울지는 마!” 했었다. 그런데 예식의 막바지 오빠 내외를 향해 신랑신부가 걸어오려는 순간부터 오빠는 잠시잠시 고개를 숙이고, 장갑낀 손이 얼굴을 지나갔다. 아이들이 큰절을 하고 인사를 하자 믿었던 올케까지 두 내외가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는데, 이를 보고 있던 나를 비롯한 고모 사인방까지 코를 훌쩍훌쩍. 앞서 조카들을 셋이나 장가들였지만 그 때는 마냥 즐거웠던 것 같은데 이번엔 왜 이렇게 연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아직도 시집을 보낸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보내며 눈물 흘리던 아버지가 생각나선지 나도 잘 모르겠다.

 피로연 자리에서 고만고만한 동생과 내 새끼들에게 “조카 시집보내는 데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데 니들 보낼 때는 예식장이 초토화 될까봐 니들 시집, 장가 못 보내겠다.” 했더니 그냥 식장에 들어오지 말고 피로연장에서 모니터로 보고 계시란다. 고이얀 것들. 곧 죽어도 안가겠다는 말은 않는다. 부모님의 반대를 모른 체하고 시집온 나의 아이들이 할 만한 얘기다 싶다. ‘엄마, 아부지요 첫 손주사위 든든해 보이고 좋으시죠? 두 아이들의 앞날이 순탄할 수 있도록 지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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