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숫가루 한사발 하실래예

고 순 덕

 

 매미소리 요란한 한 여름. 장날이던 아니던 시내를 자주 나가시는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낮차를 타고 귀가를 하신다. 그리고 열흘이 하루같이 밖에서 돌아오실 때면 “너머이는?” 마루에 엎드려 방학숙제를 하다 잠이든 난 화들짝 놀라 깨어 “엄마! 뒷골 밭에요.” 대답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아버진 늘 집에 들어오면 엄마부터 찾으셨고, 다음은 샘으로 가 윗옷을 벗어 샘가 나뭇가지에 걸치셨다. “어허이 덥다. 얼릉 와 물 한바가지 퍼 부 봐라!”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마당을 가로질러 샘으로 가 두레박을 내리고 줄을 이리저리 튕겨 시원한 물을 한 두레박 길어 올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등에 쏟아 부으면 “어허, 어허 아이고 시원타 어허, 어푸후.” 그러다 보면 밭에 갔던 엄마가 낮차시간에 맞춰 땀을 닦으며, 대문을 들어선다. 두 번째 두레박물은 바가지에 담아 부엌으로, 엄마가 막 길어온 샘물에 설탕을 한 숟가락 곁들인 미숫가루를 탄다. “순더가!” “응?” “이거 너 아부지 갖다 드리라.” “우리꺼는?” “얼릉 안가따 드리고 뭐 하노!” “씨이 엄마 우리도 타주지......” 미숫가루 한 숟가락도 아끼고 귀하던 그 시절.

 
 

 엄마는 볕 좋은 초여름 날 찹쌀이랑 보리쌀 등,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곡물들을 쪄서 말리거나 볶아서 미숫가루를 만들었다. 고슬고슬 찐 밥을 장단지 위나 샘뚜껑 위에 말릴 때면 어린손이 오르락내리락, 꼬들꼬들 마른밥은 껌 같기도 하고, 단맛이 났다. 산양장날에 맞춰 엄마가 미숫가루를 빻아 오는 날은 온 식구가 커다란 양푼이에 미숫가루를 한가득 타서 나눠 먹었다. 달달하고 구수하고, 국사발에 한사발 배당받아 마시면 더위는 싸악, 비어있던 배는 벌떡 불러왔다. 이건 미숫가루를 해 오는 날 딱 하루의 특혜일 뿐. 엄마는 미숫가루봉지를 꽁꽁 비틀어 묶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 두었다.

 
 

 하지만 엄마의 보물창고를 모를 리 없는 동생과 나는 인쥐가 되어 다락을 오른다. 비닐봉지도 귀하던 시절. 헌책이나 다 쓴 공책을 찢어 고깔모양으로 접고 살금살금 미숫가루를 퍼낸다. 엄마 몰래 주머니나 앞자락에 숨기고 “엄마 놀러갔다 오깨.” 혹시라도 불러 세워 같이 밭에라도 가자고 하면 어쩌나 들릴 듯 말 듯 ‘출필고’를 한 다음 냅다 골목을 나선다. 전날 꼬마네가 먼저 미숫가루를 했고, 라면봉지에 싸 들고 나온 미숫가루가 그렇게 맛날 수가 없었다. 온 동네 조무래기들이 꼬마의 주변에 둥글게 모여 들어 꼬질꼬질한 손을 옷자락에 슬쩍 닦고는 “쪼끔만 응? 나 쪼끔만.” 처음엔 한봉지 가득 있는 미숫가루를 이 손, 저 손 조금씩 나누어 주고 모두가 입안에 침을 모아 마른 미숫가루를 입안에 굴려가며 먹는다. 혀끝으로 낼름낼름 찍어 먹기도 하고, 물에 타서 먹는 맛도 좋지만 이렇게 마른가루를 먹는 맛도 제법이다.

 한번 맛을 본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다시 두 번째 손을 내밀고 “나 쪼끔만 더. 한번만 응?” 그러나 온 동네 아이들에게 쪼끔씩 나눠준 라면봉지 속 미숫가루는 금방 반 이상이 줄어버리고, 인심 좋은 꼬마도 그 때부터는 더 친함과 덜 친함을 따져가며 나눠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덜 얻어먹은 누군가는 삐져서 집으로 가 미숫가루 해 달라고 엄마에게 조르다 등짝을 얻어맞기도 했다. 그럭저럭 골목의 미숫가루 나눔이 끝나갈 무렵 급기야 꼬마는 얼마 남지 않은 미숫가루를 봉지째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켘켁켁!” 꼬마의 입술과 얼굴은 물론 앞에 서있던 말숙이의 얼굴까지 온통 미숫가루귀신이 되어 버렸다. 그 꼴을 보고 또 다시 “푸하하하하하.” 골목엔 미숫가루 고소한 웃음이 가득 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미숫가루를 들고 나온 꼬마는 그 날도 골목대장이다.

 
 

 골목의 모든 아이들이 꼬마가 하자는 놀이를 하고, 꼬마가 정한 규칙을 따른다. 동갑내기 꼬마의 대장자리를 단 한번 만이라도 빼앗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 몰래 들고 나온 미숫가루. 그런데 이런이런, 꼬마는 전지분유를 들고 나왔다. 꼬마네 어머닌 미숫가루에 전지분유를 섞어서 타 주셨는데, 이번엔 꼬마가 그 전지분유를 싸가지고 나온 것이다. 아이들은 나의 미숫가루는 쳐다보지도 않고 모두 꼬마의 전지분유로 몰려들었다. 목도 메이지 않고, 마른 미숫가루보다 단맛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묘한 고소함. 난 그 날도 꼬마에게 손을 내미는 넘버2 였다.

 며칠 전 같은 마을에 사는 또래의 형님이 새로 한 미숫가루라며 한 봉지 가득 싸 준다. 아침 굶지 말고 미숫가루라도 타 먹고 다니란다. 아직 냉동실에 숙모님께서 나눠주신 검은콩 미숫가루도 그대로 있고, 잘 먹지도 않는데...... 쭈뼛거리며 받아다 냉동실에 감금. 그런데 휴가 나온 아들이 의외로 냉동실에 감금 당한 미숫가루를 보고 반색을 한다. 곧 얼음물과 꿀을 넣어 한 사발 타서는 내게도 한잔 건넨다. 예전에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엄마가 정을 담아 타 준 미숫가루처럼, 아들이 내미는 미숫가루 한잔에 정이 보인다. 그리고 미숫가루를 나눠준 형님의 인심도 함께 느껴져 더위를 이겨낼 힘을 준다.

여러분들도 미숫가루 한 사발 하실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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