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돼지저금통의 추억

고 순 덕

 

 8월. 연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 혹 몇이나 되나요? 어릴 적 연 초 계획 중 독서, 일기쓰기, 그리고 저금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그 옛날 집집마다 빨간 돼지저금통 한 마리씩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도 그랬다. 설날 받은 세뱃돈으로 작고 빨간 돼지저금통을 사서 올해는 꼭 가득 채워 예쁜 가방이나 구두를 사고 싶었다. 돼지의 무게를 늘이기 위해 애써 100원짜리 지폐를 10원짜리 동전으로 바꾸어 넣기도 하고, 동생 것이 더 무거운가 내 것이 더 무거운가 겨루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세뱃돈을 넣은 후에는 도무지 현금 수입이 없어 돼지저금통을 채울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는 용돈의 개념이 없었다. 그저 필요할 때 얼마 주세요 뿐. 그러니 돈을 만질 기회조차도 없어 돼지 밥을 줄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아버지가 장에 다녀오면서 한 푼씩 거들어 주기도 했지만, 작은 돼지의 뱃속은 항상 굶주려 있었다. 하지만 큰오빠의 커다란 빨간 돼지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방위병이었던 큰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술, 담배 전혀 않고 절약이 몸에 베여 매일 타고 다니는 교통비 외에는 모든 용돈을 돼지 밥으로 넣었다. 쪼맨한 우리의 돼지와는 달리 커다란 오빠의 돼지는 식성도 좋았고 그 만큼 무게도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없는 상방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다가 저금통 안으로 채 들어가지 못하고 빼꼼이 얼굴을 내민 10원짜리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나 좀 꺼내 조. 여 찡겨서 깝깝해!”하는 것 같았다. 난 그 10원짜리를 구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톱을 세우고 젖 먹던 힘을 다 해 꼬집어 꺼낸 10원. 가슴이 콩닥거렸다. 오빠의 저금통 안엔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 있나 궁금해졌다. 두 손으로 무겁게 들어 흔들흔들, 머리 위 거꾸로 들어 다시 흔들흔들. 그런데 어라 다시 걸려든 10원짜리. 하지만 쉽사리 꺼내어 지질 않았고, 난 동전이 들어가는 입구의 한쪽을 눌러 벌리고 다시 흔들어 10원짜리를 몇 개를 더 빼 내었다. 그리고는 내 저금통에 넣었다. 그 정도로 내 저금통이 무거워진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 더 넣었으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했어야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짝꿍 혜경이가 문방구에서 뽑기를 했는데, “왕”을 뽑아서 10원으로 콩과자를 50개나 받아 와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부반장인 나보다 더 인기를 얻었다. 샘이 난 나는 왕도 뽑고 인기도 되찾을 욕심에 다시 오빠의 돼지 뱃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난 왕을 뽑기는커녕 “꽝”만 거듭해 뽑았고, 점심시간 문방구에서 동생에게 이를 들키기까지 했다. “언니야! 언니 니 뭔 돈으로 뽑기 하는데? 언니 니꺼 저금통 뜯었나?” 얼른 동생의 입에 콩과자를 넣어주었다. “니 엄마, 아부지한테 일라주만 알지! 오빠한테도.....” 그리고 들고 있던 남은 돈을 모두 동생에게 주었다. 동생은 그게 무슨 돈인지 모른 채 어리둥절해 하며 받았고, 그 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안 분위기가 싸아 했다. 동생이 내가 준 돈으로 엄마에게 까스활명수를 사다 드린 때문이었다. 정이 많고, 엄마를 유난히 따르는 동생은 엄마가 그 즈음 다리 아프다는 얘기를 자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래서 동생의 생각에 엄마가 깨맹수(까스활명수)만 먹으면 ‘끄윽!’ 하고 다 낫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엄마의 다리 통증을 낫게 하기 위해 그것을 사다 드렸던 거다. 당연 돈의 출처를 물었을 거고, 나의 부정을 충분히 짐작하셨을 터. 아버지는 전화기를 돌려 경찰서를 대 달라고 했고, 난 울며불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이런 추억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머리위로 빨간 돼지저금통을 흔들어 보았으리라 생각하면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세월이 흘러 분홍 꽃돼지저금통 한쌍을 결혼선물로 받았다. 한푼 두푼 잊은 듯 모았다가 정말 생활비가 부족하던 때 저금통의 아랫부분을 열어 도움을 받았다. 쏟아놓은 동전더미를 10원, 50원, 100원, 500원으로 각각 분리해 열 개씩 줄을 세우고, 간간이 나오는 지폐는 보물을 만난 듯 반가웠다. 예나 지금이나 집집마다 저금통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저금통을 선물 받거나 준비할 때 작은 희망? 목표? 하나쯤은 가졌을 것이다. 그 저금통을 다 채우고 처음 목표했던 무언가를 이루어도 좋고, 그러지 못하고 급한 어떤 일이 생겨, 부득이 다 채우지 못한 채 다른 일에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뭐 어떠랴. 어떤 일에건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저금통의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는 빨간 돼지저금통에 동전이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마음의 저금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계속되는 무더위를 이겨낼 체력의 저축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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