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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악서원...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의 종가시리즈 13번째
변해철 편집국장  |  ynt@y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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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8  09: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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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악서원...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상주시 근교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한 산이 갑장산이다. 갑장산은 일명 연악산이라 한다. 연악산 아래 수석이 빼어난 곳은 바로 연악구곡이다. 연악구곡의 제2곡인 사군대에 당시 상주목사인 신잠 목사가 서당을 세우고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본인이 직접 연악서당(기록에는 연악서원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이 기록물을 남길 당시, 서당이 서원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이라 글씨를 써서 걸었다 한다. 그 이후로 이곳은 선비들의 유상처가 되었고, 후계 김범이 시를 지어 기념한 뒤로부터 여러 선비들이 연달아 이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으며, 그때마다 시를 모아 시축을 만들고 연악서원에 보관하여 왔다 한다. 그 후 상산사호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임술년(1622년)에 가진 연악문회이고, 그 때의 기록은 연악문회록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연악서당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공부할 장소가 없게 되자 모두들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만력 신묘년(1601년)에 남계 강응철 선생이 전에 있던 동몽재(童蒙齋)의 터에 작은 규모의 집을 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서당이었던 건물 이름을 연악서원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자 여러 선현들께서 옛 서원의 모습이 중수된 것을 기뻐하고 장수유식(藏修游息)의 장소로 삼았으니, 이곳이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멋진 장소이고 또 남계선생이 이곳의 원장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 연악서원

 남계 강응철은 일명 ‘5세신동’이라 하는데 갑장산 아래에 있는 상산을 주무대로 활동하였기에 상주의 ‘상산사호’중의 한 사람으로 불렀다. 강응철은 이곳을 무대로 여러차례 행사를 가졌는데 1622년에는 문회를 열고 이때의 문회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것은 바로 연악문회록이다.

 이때부터 명공과 석사들이 이 서원에 들리게 되면 반드시 노래를 하고 시를 지었으며 그 행사를 글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을 서원에 보관되어있는 문회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 장소가 협소하여 애로가 있자, 강응철의 아들인 와운 강용량이 5칸짜리 건물을 지었으니 그 모습이 옛날의 규모와 같게 되었다 한다. 이때 명륜당도 만들었고 없어진 연악서원이라는 편액은 이산뢰가 다시 쓴 것으로 걸게 되었다.

   
▲ 연악서원 현판

 이 서원이 먼 곳에까지 잘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곳에서 연악문회를 열었기 때문이고, 연악문회록 속에 있는 인물이 모두가 명현이며 그들의 문장이 또한 뛰어났기 때문인 것이다. 임오년에 도내의 여러 선비들이 근암서원에 모여 “연악서원은 선현들이 평소에 기거하시던 곳이니 마땅히 제사 지낼 곳을 마련해야 한다.”라 발의하여, 그해 3월 3일에 야촌 손만웅과 여러 장노들이 옥성서원에 모여 철향의 논의를 거치니 인근의 모든 서원에서 통문이 도착하여 좋다고 하므로 여러 곳의 노력과 지원을 받아 건물을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진년 봄에 손경석이 원장일 때 명륜당 앞에 문루를 만들고, 그 좌우의 좁은 방은 안택재(安宅齋)와 정로재(正路齋)라 이름을 붙였으며, 가운데 방은 연원각(淵源閣)이라 써서 걸었다. 그 당시에 이곳은 상주에서는 절경지이었다. 신잠 목사가 서숙을 세우고 선현장노들이 이곳에서 시를 짓고 놀았으며 그때의 주옥같은 글들은 그 책에 남아 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술년에 강당을 중수하고, 또 신묘년에 여러 선비들이 묘우를 강당의 뒤에 세우고 세 선생을 모시고 봉안 하였다. 그 후에 60년이 지난 무술년에 하산 성덕징이 작은 누각을 하나 세우고 그 이름을 연원(淵源)이라 하였다. 그리고 손경석 원장은 숭정기원후 91년 무술년 늦봄에 그 문루 앞에 기문을 써서 걸었다. 또 이방당(二方塘)이 있어서 그곳에 물을 끌어다 대니 매우 맑고 좋아 그 곳에 기대어 서서 바람을 쐬며 그 흘러가는 물을 구경하면 춘풍에 기수(沂水)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한다.

 기해년 가을에 민진후 판서가 국내 서원의 폐단이 많으니 계미년 금령 이후에 창건한 서원은 훼철하기로 임금께 건의하여 받아들여지자 연악서원도 그 대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순영에 정문을 올리고 예조에 가서 탄원하기도 하였는데 강만원이 예조에 가고, 성덕징은 장두(狀頭)가 되었었다. 그 후 다시 연악서원은 철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연악서원중건기에는 연악서원의 내력과 연악구곡 그리고 연악동에서 문회를 연 사실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갑장산이 힘차게 동쪽으로 뻗어 나와 좌우로 벌려 한 구역을 이루니 이것을 연악산이라 한다. 여러 산이 서북으로 둘러있고 대천(大川)이 동남쪽으로 감아 돌아 수석이 맑고 기이하며 계류구곡의 탁영담과 영귀암이 이 산에서 좋은 경치이다. 1553년에 신잠 목사가 서원을 창건하여 선비들의 공부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연악서원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현판을 걸었는데 임진왜란에 불타 버렸었고 그 후 옛터에 중건하여 낙지정 운정  남계 석천  북계  와운 등 여러 선생 6현을 향사하는 곳으로 삼았다.

 고종 9년에 조정의 명령으로 훼철되어 선비를 양성하던 서원이 풀밭으로 변해버려 사림에서 한탄해 온 지 오래되었다.1986년 봄에 유림이 모인 자리에서 서원을 복설하려는 의논이 제기되어 후손과 향유들이 뜻을 같이 하여 각자 성금을 내고 또 도비의 보조를 얻어 10월 상순에 기공하여 다음해 중춘에 낙성하였다.

 서원에 있는 전후 사적을 살펴보니, 선현의 유택이 이 서원보다 많은 곳이 드물고, 또 지금 선비를 양성하는 방도가 구비되면 이로부터 학문을 지향하는 선비들이 소문을 따라 모여들어 여기서 교유하고 여기서 강마하며 선현의 유덕을 존모하고 학문을 강구함으로써 문운이 온 향중에 완연히 일어 나라의 풍화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낙성하고 원장인 송인환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모르지는 않으나 여러분의 성의에 감동하여 삼가 그 전말을 써서 높고 크게 존경하는 뜻을 담았다. 이 일을 주관한 분은 조성학과 윤지원  이정만  강우석  유재복  황대연 등이 심력을 다했음으로 여기에 추록한다. 정묘년 정월에 삼가쓰다.

 지금 갑장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유서깊은 연악서원의 모습을 보고나면 마음이 아프다. 묘우와 강당이 연악구곡을 사이에 두고 갈라 서 있고, 묘우는 비가 새서 임시로 덮어 놓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이곳에 배향된 인물 가운데 상주지역 최초의 의병장도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재령강씨, 풍양조씨, 영산김씨 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상주 문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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