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에....

고 순 덕

 결혼 전, 난 무엇에 집중하느라 밤을 지새워 본 기억이 없다. 열심히 공부를 하지도, 밤새워 책을 읽지도, 시험 전 벼락치기를 해 보지도 않았다. 결혼 후 아이가 아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느라 분노와 염려가 뒤섞인 밤을 하얗게 불태운 기억이 있을 뿐. 심지어 요즘은 밤잠을 설치거나, 잠이 부족하면 다음 날 두통으로 인해 퇴근 시간만 기다리곤 한다. 그런데 오늘 밤은 낮잠을 충분히 잔 탓인지 늦게까지 드라마를 보고 문득 마당을 나섰다. 까만 밤하늘에 별이 총총, 그 아래 보이지 않는 풀밭에선 귀뚜리를 앞세운 풀벌레 노랫소리가 멋들어 진다. 땅위에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에 하늘의 별무리들이 춤을 추는 듯하다. 맨팔에 돋은 소름을 쓱쓱 문질러 잦아들게 하는 가을밤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밤을 지새운 건 아니지만 밤늦도록 무언가를 한 기억이 유성처럼 번뜩인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저음의 편안한 별밤지기의 시그널이 흐르면 베개를 가슴 밑으로 끌어당기고 라디오 또한 턱 밑까지 끌어당긴다. 옆에는 필기구가 놓여 있다. 혹시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받아 적기 위함이다. 신곡 하나를 완벽하게 받아 적으려면 먼저 기억할 수 있는 가사를 적어두고 불분명한 부분은 비워 둔다. 몇 번씩 노래를 반복해 들어야 했지만 당시엔 녹음기가 텔레비전보다 귀하던 때라 집중해서 한 소절씩 듣고 기억했다가 쓰는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가 되고, 녹음기와 라디오가 함께 있는 카세트가 생기게 되면서부터는 엄마, 아버지와 함께 보는 텔레비전보다 라디오 듣기를 더 즐겼다. 언니, 오빠들이 외지로 떠나고 빈 상방(건넌방)을 차지한 동생과 나는 카세트의 라디오를 켜 두고, 언제라도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을 할 수 있도록 공테이프(빈 카세트테이프)를 걸어두고 기다렸다. 

 
 

 별밤지기 이종환 아저씨의 곡을 소개하는 멘트가 끝나면 손끝이 바르르 동그랗고 붉은 그림이 그려진 녹음과 오른쪽이 뾰족한 플레이버튼을 동시에 누른다. 하지만 이럴 때 꼭 이웃집 개가 짖거나, 엄마의 외침이 들린다. “전기세 마이 나온다. 얼릉 불 끄고 고만 자거래이!” ‘잘 시간 되면 어련히 잘까, 전기세가 나오면 얼마나 나온다고...... 오늘도 망쳤다.’ 같은 노래를 연 이틀 틀어주는 예는 지극히 드물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그 노래가 나오면 다시 크게 쉼 호흡을 하고 두 개의 녹음기 버튼을 누른다. 오늘도 실패! 이번엔 광고에 노래가 잘리고 말았다. 그 외에도 중간중간 별밤지기의 멘트로, 버튼을 동시에 잘못 눌러서, 녹음테이프 돌아가는 잡음이 커서 등등 좋아하는 노래의 전곡녹음은 멀고도 험했다. 그러다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곳이 있었으니, 카세트테이프와 음반을 팔며 원하는 곡을 적어가면 비싼 가격에 녹음을 해 주는 가게다. 앞쪽 열곡정도, 뒤쪽 열곡정도 수록되면 전,후 빈 공간 없이 빽빽하다. 좋아하는 곡들만을 골라 들을 수 있기도 하고, 선물용으로도 천마리의 종이학 못지않게 좋았다. 가끔씩은 기존 테이프에 좋아하는 곡을 덧씌워 녹음하기도 했고, 오래 반복해 듣다보면 테이프가 늘어져 소리도 함께 늘어졌고, 또 가끔씩은 테이프가 씹히고 엉켜 음성변조를 하거나 2~3배속을 해서 듣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때는 그랬다.

 
 

 그리고 어떤 별밤지기의 별밤을 들었느냐에 따라 세대차를 짐작할 수도 있다. 난 古이종한, 이문세 세대. 古이종환과 이문세 외엔 별밤지기를 알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현재 26대 별밤지기 산들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별밤지기”라는 단어는 이문세 DJ 시절에 보내온 엽서내용 중 등대지기에서 착안해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맞다! 그 때는 사연과 더불어 신청곡을 써 보내고는 우체통에 엽서를 넣은 날로부터 방송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당시 우편물은 최소 3일은 되어야 상대방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버젓이 알면서도 말이다. 그만큼 간절한 때문이었으리라. 딸아이가 고3때인가 별밤에 사연이 공개되고 받은 선물이라며 부채를 다시 내게 선물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아!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지금도 하는구나!’ 알게 되었고, 고3이 제정신이냐며 야단을 쳤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시절을 지내 왔으니......

 
 

 오늘은 이미 자정을 한참 지난 시각이니 내일은 별밤을 한 번 들어 볼까나? 아니면 그 옛날 즐겨듣던 그룹사운드의 노래나 7080 노래? 그도 아니면 남편의 군생활 3년 동안 남편대신 내 곁에 있어준 ‘슬기둥노래’를 들어 볼까나? 남편이 입대하면서 내게 선물한 마이마이(소형 카세트, 오토리브스 기능이 있는)와 슬기둥 카세트테이프. 그 당시엔 주머니나 가방엔 마이마이, 귀엔 이어폰을 끼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도 남편 덕에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가을이 느껴지는 밤바람이 라디오와 카세트, 녹음테이프, 마이마이 등 추억이 깃든 소리통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제 그만 ‘아이유의 꽃갈피’를 들으며 잠을 청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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