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무시

고 순 덕

 지난해처럼 장독위에 감 홍시를 하나 올려 두었다. 가을의 한가운데 와 있음을 실감한다. 지난주엔 밤이 늦도록 어린 풋고추의 배를 가르고, 가루를 발라 쪄 널었다. 긴긴 겨울 특별한 반찬꺼리가 없을 때 기름에 튀겨 설탕과 소금을 솔솔 뿌려 먹으면 별미인 고추부각. 누렇게 변한 깻잎도 한장한장 따 포개 묶어 삭히고, 양념간장을 얹어 깻잎짱아찌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고들빼기도 캐서 삭혀야 하고, 조금 더 있으면 찬바람이 일고 서리가 내리면 가을 무시(무)를 뽑고 말려야 한다. 무시, 무꾸, 조선무라고도 하는 가을무는 먹고 트림을 하지 않으면 산삼에 비할 만큼 그 효능이 뛰어나다며 먹기 싫어하던 무밥 먹기를 권하던 엄마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가을무는 햇빛을 향해 초록빛으로 자란 윗대공 부분은 그 단맛이, 하굣길 무서리 유발자다. 따가운 가을볕을 맞으며 십리 길을 걷다보면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지만 어린 심심한 동심에 초록초록 땅을 뚫고 올라온 푸른 무의 아랫부분은 얼마나 자랐고, 어떤 맛일지 궁금해진다. 살금살금 들판 주위를 살피고 무청이 무성한 밭으로 입성. 머리채를 휘어잡듯 까실까실 가시털이 있는 무청을 잡고 힘을 주면, 어렵잖게 뽀얗고 튼실한 무가 쑤욱 올라온다. 무청을 비틀어 떼어내고는 툴툴 흙을 털어 바지춤에 남은 흙을 닦아낸다. 크게 무청 잔해가 남은 머리를 베어 물어 퉤 뱉어 버리고, 두툼한 무 껍질을 돌돌 돌려가며 깍아 푸른 무를 한입 베어 먹으면, 아삭아삭 아린 단맛이 베어 났다.

 
 

 그러면 지쳤던 발걸음에 힘이 솟고, 한참을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푸른 부분이 없어지고, 흰 가장 두꺼운 자리를 지나면 점점 단맛은 사라지고, 아리고 매운맛이 강해진다. 이즈음이면 큰고개도 넘었겠다, 작은 고개만 넘으면 마을이 보이니 미련없이 무를 산쪽 풀숲으로 던진다. 후다닥 방아깨비가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 도망을 하고, 나의 발걸음은 나를 듯 가볍고 빨라진다. 그 때 무를 뽑아 먹고 달려서 내 다리가 무다리가 된 것일까?

 
 

 아부지가 구루마(소 달구지) 가득히 뽑아온 무를 마당에 무심히 내려두고 장엘 나가면, 엄마는 무청을 떼어 엮어 널고, 무 구덩이 넣을 것과 당장 먹을 것, 썰어 말릴 것과 사촌들에게 나눠줄 것들로 구분을 했다. 밤이면 무를 대소쿠리 가득 썰어서 아침 이슬이 마르기전, 장대를 담에 기대어 걸쳐두고 대발을 몇 개씩이나 펴서 무를 널거나 실에 꿰어 처마 끝에 걸어 말렸다. “가을 무꾸는 보약이라. 햇비세 말루만 맛도 더 좋아지고, 몸에도 더 좋아지지. 올 적엔 무꾸밥나 해 먹으까? 장물에 참기름 똑 띠기가이고 비비만 딴 반찬 없어도 대깨.” 엄마는 가을이면 무밥에 무전을 자주 해 주었다. 어릴 땐 밀가루 옷 훌훌 벗고 뜨거운 무전도, 지룩한 무밥도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고등어조림에 들어있는 무보다는 고등어흰 속살이 더 맛있었고, 고추잎 말려 함께 넣어 버무린 골금짠지(무말랭이김치)는 그나마 조금 먹을 만 했지만, 그도 이른 봄까지 도시락반찬으로 줄기차게 들고 다니면 질리고 창피한 마음도 있었다.

 그 때쯤이면 냉장고가 없어 아무리 짭짤하게 버무린 골금짠지도 살짝 맛도 변하고, 어느 날인가 엄마는 양념을 씻어내고 콩기름을 두르고 달달 볶아서 도시락반찬으로 넣어 주었다. 그러면 또 다른 맛이 나 며칠은 그럭저럭 지나기도 했다. 무는 긴긴 겨울 감기약 대용으로 날 무를 숟가락으로 긁어 먹기도 했고, 파뿌리와 곶감 등과 함께 끓인 물을 감기약처럼 마시게도 했다. 정월대보름이면 무구덩이 속 무를 꺼내 부름깨기 품목에도 넣었었다. 제수품목에도 배추전과 더불어 무전은 반드시 진설하는 것으로, 아부지도, 엄마도, 남편도 특히나 좋아하는 전이다. 그리고 그 때는 아니지만 지금은 나도 적잖이 좋아하고 즐기는데, 특히나 가을, 초겨울에 따뜻하게 구워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가을무는 달고 단단해서 생채를 해도 깍두기를 담아도, 들기름을 두르고 무국을 끓여도 맛있다. 가을무는 무얼해도 맛있다.

 
 

 못생김의 대명사인 호박과 메주 그리고 무시(종아리가 굵고 못생긴 다리)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우리의 식재료 속 깊은 곳까지 찾아들어 없어서는 안되며, 그 영양마저 풍부하다. 남편은 간혹 나를 호박꽃이라 부르거나 소개했다. 그 때는 싫었지만, 지금은 그 말마저도 다시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의 무 다리가 가을 무시만큼이나 달고, 가치 있는 삶으로 나를 이끌어주길 바람해 본다. 나의 우람한 다리여 너의 계절인 가을이 왔도다. 자 일어나 더욱 힘을 내자. 무 다리를 가지신 여러분 우리의 계절 가을입니다. 힘을 냅시다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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