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담은 문풍지

고 순 덕

 찬바람이 소맷자락을 비집고 든다. 가을이 힘없이 겨울에 밀려 사라지려나? 아직 가을일도 끝내지 못했고, 겨울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문득 가을이 싫다는 생각이 스치고, 어깨가 움츠려 진다.

 

 
 

학교를 가지 않는 어느 가을날 아침,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서 뒹굴거리는데 엄마가 방문을 들어서 떼어 냈다. 겨우 서리를 말린 찬바람이 그대로 방안으로 달려들었다. “엄마! 추와여. 왜그래?” “얼러 안인나나! 빗 조을 때 얼릉 문종우(창호지)를 발라야 다 마르지.” 그 날은 월동준비 중에 하나인 문종이를 다시 바르는 날이다. 꿈지럭꿈지럭 달팽이마냥 느린 몸놀림으로 방을 나오면, 어느새 엄마는 안방과 상방에서 떼어낸 문들을 봉당(뜨락)에 기대고 낡은 문종이(한지)를 떼어낼 것을 지시한다. 동생과 난 처음엔 주욱쭉 종이 찢기가 재미있어 잠시 신이 나지만, 곧 문살에 붙은 종이들을 물을 발라 불리고 떼어내는 작업에서는 허리도 아프고, 아무리 손톱을 세우지거나 집세기(지푸라기)로 문질러도 잘 떨어지지 않아 고전을 한다.

 슬슬 엄마의 위치와 눈치를 살핀다. 엄마는 아침 설거지를 마친 작은언니가 쑨 풀이 너무 되다고 찬

 
 

물을 섞어 묽게 하고 있다. ‘요때 도망을 쳐야 하는데, 아들(친구)은 벌써 옥골할매네 집앞에 모있을낀데.....’ 머리가 복잡하다. 동생에게 눈짓을 하고 뒷꿈치를 들고 돌아서려는 순간, 정지(부엌)서 나오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이누무 지지바들이 또 어델 내뺄라고? 너들 오늘 이거 다 안마르만 문도 못 달고, 추운 방에서 자야댄데이. 니는 아부지한테 안혼날라만 야들 잘 잡고 알아서 해래이.” 공연히 작은언니에게까지 불동이 튄다. 엄마는 바삐 뒷골밭으로 나가고, 작은언니의 목소리가 날카로와 진다. 어떤 때는 엄마보다 언니가 더 무섭다. 방을 나설 때와는 달리 머리꼭대기와 등이 따갑다. 오전 내 겨우 헌 문종이를 다 떼어내고 점심을 먹는 사이 젖은 문틀은 따뜻한 햇살과 서운한 바람이 어루고 달래어 뽀송뽀송해 진다.

 밥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엄마는 다시 작은언니에게 지령을 내리고, 엄마는 뽀얀 백포루(나이론)천을 풀에 넣어 조물조물 문틀위에 얹었다. 네 귀퉁이를 잡고 풀 먹은 백포루천을 살살 당겨 펴고, 문틀의 가장자리틀에 맞춘다. 동생과 내가 자꾸 문구멍을 내어서인지 올해 겨울부터 엄마는 문종이에 앞서 하얀 천을 덧바르기로 했나보다. 풀 먹은 백포루는 이내 까닥까닥 마르고, 마루바닥에 대고 언니가 고르고 곱게 풀을 마른 문종이를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펴, 먼저 바른 천위에 살포지 얹고 엄마의 낡은 런닝으로 문지르며 눌러 붙인다. 안방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문 한쪽 가운데는 U자로 칼집을 넣어, 밑이 넓은 직자각형의 작은 구멍을 내고 유리를 대었다. 춥디추운 겨울날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살피기 위한 방범창(?)과도 같은 지혜의 창을 내었다. 그리고 칼집을 내어 걷어 올렸던 종이를 다시 내려 평소에는 방안의 모습을 밖에서 볼 수 없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난 이렇게 지혜로운 우리 엄마의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섬세한 작은언니는 여기에서 일을 끝내지 않았다. 대충의 큰일을 끝내고 엄마가 다시 서둘러 들로 나간 언니는 코스모스와 예쁜 잎새를 따다가 문고리 옆에 장식을 하고, 다시 문종이를 조금 덧대어 붙였다. 서산으로 슬그머니 기울기 시작한 가을 햇살에 풀은 종이와 천, 문틀을 한데 꽁꽁 묶어두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온 엄마는 휘익 누워서 정갈하게 마른 문을 살피고, 다시 문틀에 맞추어 끼웠다. 저녁을 먹는 내 문구멍이 사라진 문 덕분에 따뜻했고, 방안은 깨끗한 창호지 덕분에 더욱 환해졌다. 겨울이 되어도 문고리 가장자리에 코스모스는 여전히 지난 가을의 미소를 전하고 있었고, 문틀에 비해 넉넉히 붙인 창호지는 너풀너풀 문틀과 문꼴 사이를 메웠다. 삶에서 채득된 어른들의 삶의 지혜가 전해졌다.

 이제는 월동준비로 뽁뽁이와 돌돌말린 문풍지를 많이들 사고, 각종 경비업체가 직장과 집은 물론, 여기저기 깜빡이지 않는 눈들이 지키고 있는 살벌 안전한 세상.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도 커다란 솜이불 아래 서로 이불 당겨가며 잠들던 그 때가 더 따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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