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만남은....

고 순 덕

 대학 첫 가을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석양을 등지고 본관 전시실 앞에 있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눈부신 노을과 석양 탓인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붉고 환한 노을 속에서 걸어 나오는 듯 한 그의 걸음은 유난히 훤칠하고 씩씩해 보였다. 후광이 비쳤다. 그가 내 앞에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알아보기까지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느리게 다가왔다. 그것이 내 운명의 남자에게 첫 콩깍지가 씌이던 순간이다.

 그는 축제 중 다쳐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막 퇴원을 하고 학교로 복귀하던 참이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말인 즉, 그가 다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축구를 하다가 다친 것으로 알고 있던 난 따져 물었더니, 축구를 할 때 상대 골키퍼와 몸싸움을 했고, 경기에 진 상대 과의 골키퍼와 그의 주먹 쓰는 친구들이 나를 찾기 위해 주점에서 나간 그를 욕보였다고 했다. 나를 찾은 이유는 당시 과대표였던 그가 과의 대표로 행사에 참가한 나에게 감사의 뜻으로 술 한 잔 사주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니 나를 찾아 나섰다가 일을 당했고, 그가 다친 것은 나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워진 나는 학교를 비울 수 없는 처지여서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조심스럽게 “선배 나 때문에 다쳤다면서요? 죄송합니다.” “누가 그러던데? 아니라.” “식사는 하셨어요?” “○○이가 죽 갖다조서 먹었어. 너 때문 아이라. 끈어.” “웅~~~~.” ○○이는 우리 학교에서 젤 예쁘고 인기 많은 친구였다. 그리고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후로 우린 따로 만나기도 했고,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그는 늘 책을 즐겨 읽었으며, 당시에 삼국지를 다섯 번이나 탐독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주 삼국지에 나오는 얘기들을 현실에 빗대어 이야기 해 주곤 했다. 그의 손에는 늘 지난번 만날 때와 다른 책이 들려져 있었고, 약속에 늦은 나를 기다리면서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잘 읽지 않던 난 그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어느 날인가 함께 있다가 내가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요?”하고 했더니 서슴지 않고 툭 시각을 얘기한다. 확인해 보니 5분 내외의 오차 거의 정확했다. 신기한 마음에 만날 때마다 자주 시각을 물었고, 그 때마다 그는 미리 시계라도 본 듯 대답을 했고 정확했다. ‘아! 이 남자 시간 개념이 정확한 사람이구나!’ 무척이나 멋졌고, 또 한 장의 콩깍지 추가. 키가 작은 것도, 몸이 약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떠 어느 날인가는 함께 길을 걷다가 집에 전화를 해야 한다며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듯 했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아부지 좀 바까조.” 라고 얘기하더니 그동안 공중전화 박스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서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옷매무새를 갖추고, 바르게 서서 “예 아부지!” 하는 거다. ‘어머나? 집안이 엄하고, 뼈대가 있는 가문인갑네.’ 세 번째 콩깍지가 씌이면서 난 그의 바다에 더욱 깊이 빠져 들었다. 그리고 5년여 달콤 살벌한 만남을 가졌고 결혼을 했다. 선배는 남편이 되었고, 산애아빠가 되었다. 남편은 가족과 자신의 삶에 충실했으나 세상은 녹녹지 않았다. 삶이 힘들고 하는 일이 막힐 때마다 남편은 며칠씩 방에서 두문불출 책만 읽었다. 학교가지 않은 아이들을 떠들지도 못하게 하고, 숨 막히는 시간을 지내야 했다.

 
 

 저놈의 책들 다 내다버리고 싶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던 남편은 신혼 이후로 귀가시각이 늦어졌다. 핸드폰을 산 다음부터는 연락 없이 늦는 남편에게 전화를 해 언제쯤 오냐고 물으면 이제 다 끝나가니 곧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곧 이라는 시간이 기본 세 시간. 남편의 시간 개념은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 곧이 세 시간이고, 지금이 두 시간, 다 왔다가 한 시간 이었다. ‘내가 미쳤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편을 꼼짝 못하게 하시던 시아버님은 우리가 결혼도하기 전 운명을 달리 하셨고, 집안 분위기는 자유로 왔다. 아주 많이. 남편에 대한 애정은 애증이 되었고, 나의 취미와 특기는 기다림과 그래도 또 기다림이 되었다. 선배가 웬수가 되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 뱉지는 못했지만, 정말이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사람과 그만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예고 없이 그와 그만 살게 된 날, 멍하니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나와 아이들을 위로했고, 그 힘으로 난 지금껏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책갈피 속에 고이 넣어둔 고운 가을 단풍처럼 그를 간직하고프다.

 
 

 오랫동안 고운 빛깔 그대로 간직하다가, 잊혀진 듯 무심코 책장을 넘긴 어느 날 다시 열어 보아도, 그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과 이야기를 그대로 기억하게 해 주듯 그렇게 살고 싶다. 늘 가슴속에 있으되 잠시 잠시만 꺼내어 보는 나만의 비밀처럼 그렇게......

 
 
저작권자 © 영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