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부자다

고 순 덕

 지역의 특산물인 곶감을 만들기 위한 큰 일거리인 감 깍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어난 불상사. 지난 토요일 함께 일하시는 분의 손에 뽀얀 붕대가 감기어져 있다. 전 날 감깍기 작업을 하다가 감꼭지 치는 기계에 손톱을 다쳤다는 것이다. 피가 얼마나 나던지 갑자기 피잉 도는 것이 현기증이 나고 한기가 느껴졌다고 한다. 바깥분과 급히 응급실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얼굴이 하룻밤사이 반쪽이 되었다. 나도 십년전쯤 비슷한 일이 있었다. 회전하는 감꼭지 치는 기계에 장갑이 말려들고, 검지손가락을 휘리릭, 순식간에 일어난 이었다.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등줄기가 오싹했다.

 
 

  비명과 함께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들고 마당을 뱅뱅 돌았다. “으으윽 하아 쓰으읍.....” 아이들이 고통스러운 소리로 마당을 맴도는 나의 뒤를 쫒았다. “엄마, 엄마 괜찮아? 엄마, 엄마.” “산애야 엄마 수건 좀 갖다 조. 다운이는 엄마 전화기 좀 가지고 오고, 엄마 괜찬아여. 울지마. 울지마.” 정작 울고 있는 건 나였다. 병원을 가야할 것 같았다. 당시엔 우리집에 차가 한 대만 있었고, 남편은 아침 일찍 고종사촌의 결혼식이 있어 거길 가고 없었다. 아이들 넷과 쉬엄쉬엄 일을 하고 있으라 했는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병원엘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이 없으니 당연 차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에게 이웃마을에 사는 형님께 전화를 걸라고 시키고 도움을 청했다.

  상황을 설명하면 놀라실까하여 다짜고짜 “형님 저랑 놀아주세요?”했더니 “왜 산애야 뭔 일 있나?” 하신다. “이 바쁜 시기에 자네가 그냥 놀자고 할 사람이 아니지. 뭔 일인데 왜?” “사실은 일하다가 손을 조금 베었는데, 요즘 날도 차고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꿰매면 빨리 아물 것 같아서요. 산애아빠가 집안 결혼식에 가서 차가 없네요” “아이구 자네가 마이 다쳤구나. 그래그래 내가 요고 하던 거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고 가깨.” 하신다. 가까이 시누네도 있고 했지만 모두 감깍기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단 것을 알기에, 감 일을 하지 않는 이웃마을 형님께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피는 멈추지 않고 수건을 적셨지만 형님이 와 주신다는 대답을 듣고 정신이 좀 차려졌는지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차가 그제야 눈에 들어 왔다. 아침 일찍 남편은 집안에서 빌린 차를 함께 타고 갔기에 시내까지 내가 직접 데려다 주었고, 차는 집에 있었다. 그런데 다쳤을 때 놀람과 통증 때문에 그 차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면서도 보지 못했다.

 
 

  ‘바쁘신 분을 불러 어쩌지? 내가 왜 이렇게 경솔한 걸까?’ 다시 형님께 전화를 했다. “형님 아까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차가 집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형님한테 전화를 했네요. 형님 안오셔도 되요.” “손가락을 다칫다미! 운전을 우째 할라고? 마이 아푸지? 자네 집에 다 와가여. 쪼매만 참아!.” 주섬주섬 아이들의 손을 빌어 병원 갈 준비를 하고, 이내 형님이 도착 하셨다. 응급실로 갔더니 상처부위를 본 병아리 의사가 다친 경위를 묻고 윗분을 호출한다. 단순 봉합으로는 안되고 수술실로 들어가야 한단다. 신경에까지 일부 손상을 입었고, 회전하는 칼날에 수차례 베어 상처가 많이 훼손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술!” 아픈 손가락보다 수술이란 말에 더 놀라고, 남편도 없는데 병원비도 걱정 이었다. 수술해야 한다는 소리에 형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산애야, 산애아빠한테 전화 해야 안될라?” 하신다. “전화해도 다 같이 갔기 때문에 못 올거고, 괜히 다들 놀라실건데....” “그래도. 내가 안 놀래기 잘 말해 보깨.” 수술 수속을 대신 해 주고 남편과 통화까지 해 준 형님께 너무 감사하고 죄송했다. “형님 점심도 못드시고, 죄송해요. 그리고 이제 가 보세요. 제가 알아서 하깨요. 산애아빠도 온다잖아요.” “아이고 내 걱정은 말고, 자네도 굶었으민서, 수술실 들어가는 거 보고 가깨.”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수술은 두시간을 넘겼다.

 수술실에서 나오니 형님이 아직도 수술실 앞에 초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입원을 해야 했다. “형님 인제 진짜 괜찮아요.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집에 일도 못하시고, 얼른 가셔야죠?” “아이라. 인제 내가 가도 할 일도 없어. 입원실 올라가는 거 보고 가깨.” 하신다. 빈 병실이 없어 한참을 기다리다 병실을 찾았고, 침대에 누우라며 채근하셨다. 병실에 올라가서도 “산애아빠 오는 거 보고 가깨.” 하신다. 결국 날은 어두워지고 6시가 지나서야 남편이 돌아왔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런데 남편의 첫마디 “하루이틀 하는 일도 아니고, 뭐한다고 다치고 그러나?” 반가움은 쏙, 서운함과 눈물이 쑥 흘렀다. 남인 형님도 종일 저렇게 지극정성 돌봐주셨는데......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형님께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바쁜 시기에 엉뚱하게도 놀아달라는 소리에 다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예견하고, 하루 온종일을 할애해 주신 형님. 지금도 힘들거나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는 가끔 형님께 전화를 한다. 그리고 힘든 일은 얘기하지 않고 그저 서로 안부를 묻는데도 그 따스함이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힘을 내고. 다시 문제 앞에 서게 하는 용기를 준다. 형님과 같은 따뜻한 분들이 있어 힘든 세상에 홀로 서 있다는 생각을 덜게 되고, 힘을 낸다. 내 은행통장은 비록 비어 있지만, 주위에 은행이 되어 줄 사람들은 곳곳에서 나를 향해 따뜻한 미소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기에 난 부자다. 이 보다 따뜻한 월동준비가 또 있을까?

 
 
저작권자 © 영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