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눈알

고 순 덕

 

“요것들이 또 미주눈알을 빼먹네. 너들 자꾸 미주눈알 빼 먹으만 니 눈알도 빠진데이!” 엄마의 살벌한 호통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꾸덕꾸덕 겉말라 굳어가는 메주에서 덜 찧어진 콩알을 떼 내어 씹는 맛이 일품이다.

여느 날과 달리 아침 일찍 시죽(소 죽, 여물)솥뚜껑 밀어여는 소리가 요란하다. 메주를 쑤는 날은 소가 아침밥을 더 일찍 먹는 날이다. 시죽을 얼른 퍼 주고 엄마는 빈 시죽솥을 씻는다. 지푸라기를 둘둘 말아 문지르기 위해 찬물을 한바가지 부우면 달아오른 솥이 김을 모락모락 토해낸다. 손이 뜨겁지도 않은지 엄마는 연신 솥 안을 문지르고, 물을 둘러 퍼내기를 수차례. 드디어 어제부터 불려둔 메주콩을 퍼 옮기기 시작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메주를 만들려고 내가 들어가도 남을만한 커다란 가마솥이 거의 다 차 간다.

 
 

 그때서야 다시 물을 자작이 붙고 가마솥뚜껑을 끌어 올린다. 둔탁한 괭음과 함께 아버지의 불 지피기가 시작되고, 엄마는 상방 바닥에 종이포대를 깔고 쇠절구를 방으로 들인다. 네모난 미주빠꾸(메주틀)도 찾아다 두고, 컽잎을 잘 다듬어 낸 짚단도 함께 들인다. 오늘 오후도 동생과 나는 엄마에게 발목 잡혀 놀러 나가기는 다 걸렀다. 콩 삶기는 반나절이 족히 다 걸린다. 커다란 가마솥뚜껑을 밀고 기적을 울리듯 증기를 피~~이 토해내고, 얼마나 뜨거우면 가마솥이 눈물까지 줄줄 흘려댄다. 이 즈음이면 엄마는 솥뚜껑을 살짝 밀고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콩이 삶아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몇 알의 덜어내어 입안으로 쏙. 엄마만 몰래 뭐 맛있는 것을 먹나 싶어 “나도나도.” 한다. 지금은 상상만해도 구수하니 군침이 돌지만 어린 입맛에는 별 맛이 느껴지질 않는다. “에이~.” 잘 삶아졌는지 엄마는 콩을 손으로 눌러 으깨도 보고, 큰 주걱에 올라온 콩들을 가마솥 테두리를 탕탕 쳐 떨구고 다시 솥뚜껑을 끌어다 닫는다.

 “인제 뜸만 들이만 되겠네. 불은 고만 때도 되겠다.” 순간 아궁이에서 무언가 톡 하얀 것이 튀어 나온다. 나락 한 알이 튀겨져 나온 것이다. 팜콘처럼. 얼른 주워 잡티를 후후 불고 입으로 쏙. 또 없나? 두 눈이 반짝인다. 아궁이 옆 짚단을 뒤지고 낱알이 붙은 지푸라기를 아궁이로 밀어 넣는다. “톡! 톡! 토독 톡톡!” 삶은 메주보다 훨씬 맛있고 재밌다. 게다가 따뜻하기까지... “아이고 요것들이 또 불장난을 하고 있네. 다 삶아진 콩에 불을 왜 넣노. 콩 다 타서 화근내(탄냄새) 나겠네.” 엄마의 목소리가 날카롭고 차갑다. 얼른 일어나 뒤안으로 도망을 친다. 점심을 먹고 오후엔 삶은 콩을 찧은 절구질이 시작된다. 처음에 철퍼덕철썩 동그랗고 무거운 절구고가 잘도 들고 나지만, 몇 차례 반복되면 빻아진 콩들이 절구고를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러면 살살 좌우로 돌리듯 들어 올리는데, 동생과 나는 팔힘이 부족해 한 두 번 하고는 밀려 난다.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메주 딛기. 메주틀위에 보자기와 마포대를 덮고, 그 위에 삶아 찧은 콩을 얹는다.

 
 

 엄마가 요리조리 보자기와 마포대를 덮으면 드디어 동생과 내 차례. 그 위에 맨발로 올라 요리조리 찧어진 콩을 밟아 메주 모양을 만든다. “장난치지 말고, 기티(모서리, 모퉁이)로 몰아서 꼭꼭 밟아야 미주가 안깨지고 잘 뜨여(발효되다).” 처음엔 따뜻하고 말랑말랑 보드라움에 재미가 있어 요리조리 뱅글뱅글 돌아가며 작은 발로 도장을 찍듯 놀아삼아 하지만, 이것 역시 장수가 늘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루하고 힘이 들며 재미란건 사라진다. 담장 너머에서 아이들의 소리가 마냥 즐겁게 들린다. 마음은 담 너머에 두고, 대충 무성의하게 발을 놀리다보면 “지대로 안발나? 야가 올 장(장 담그기)농사를 다 망칠라카나?” 엄마의 잔소리와 아버지의 헛기침이 번갈아 오간다. 아버진 오늘 장엘 가지 않고 메주를 엮어 매는 일을 도맏았다.

 장담기가 중요하긴 한가보다. 아버지가 장에도 안나가고 돕는걸 보면. 아버진 짚의 밑둥을 서로 좌우로 맞대고 다른 지푸라기로 돌돌말아 고정을 시킨다. 그 위에 우리가 밟아 모양을 만든 메주를 다시 만져서 세운다. 고정된 지푸라기의 양쪽 끝을 각각 둘로 나누어 메주의 좌우를 감싸 올리고, 메주의 위에서 모아 새끼를 꼰다. 그리고 실겅(시렁)에 매달면 끝. 실겅 위엔 이불과 라면박스가, 실겅 아래엔 메주가 조롱조롱, 메주 아래엔 앉은뱅이책상과 고구마를 저장하는 대발이 세워져 있다.

 
 

 며칠 뒤 꾸덕꾸덕 마르기 시작한 메주에 참새마냥 동생과 내가 까치발을 하거나 책상을 딛고 매달려 있다. 덜 찧어진 콩알이 메주에 그대로 박혀 말려진 것을 빼 먹기 위해서다. 갓 삶은 콩과는 달리 쫀득쫀득한 식감이나 맛이 더 고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어보라고 주는 삶은 콩보다, 먹지 말라고 나무라는 메주눈알을 빼 먹는 재미가 더 있다. 아직 감껍디는 맛이 덜 올랐고, 고구마는 씻어 삶거나 구워야 먹을 수 있으니 귀찮다. 반면 미주눈알은 손톱이나 뾰족한 무엇만 있으면 되니 이 얼마나 간편하고, 맛난 먹거리인가? 꼬마는 그 눈알을 빼 먹기 위해 젓가락을 이용한 특수 무기(?)를 만들기도 했단다.

 메주눈알 빼먹기! 어감이 좀 살벌하긴 하지만, 고향, 청국장, 어머니와 함께 떠오르는 초겨울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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