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점(草岾)과 새재(鳥嶺)

이정록

 

 문경새재!

 고개(嶺) 하면 문경새재가 연상될 만큼 새재는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대표하는 상징적이 이름이 되어있었다. 새재를 넘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생소한 이름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문경새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에게 익숙한 그리고 친숙한 이름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개가 높고 험해서 날아가는 새들도 힘들어 한다는 새재. 그래서 한자로 조령(鳥嶺)이라고 한다는 것도 아마 모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경초점
문경초점

 하지만 새재의 본래 이름은 초점(草岾)이다. 고려사와 조선조 초기에 발행된 문헌(동국여지승람)에는 초점(草岾)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초는 억새풀을 뜻하는 것이다. 먼 옛날 이곳 새재 주변에는 억새풀이 많았나 보았다. 그래서 새재 들머리에 있는 마을 이름이 푸실이다.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억새풀을 헤치고 다래넝쿨을 들추며 마을을 열었다 는 기록이 전하고 새로 길이 뚫릴 때는 억새풀을 헤치고 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새재 주변에는 억새풀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푸실을 한자로 초곡(草谷)이라고 적고 현재 행정구역 명칭이 상초리(上草里), 하초리(下草里)이다.

 새재골짜기를 흐르는 개울도 초곡천(草谷川) 이고 제일관문인 주흘관의 성벽도 초곡성(草谷城)이다.

문경새재 1관문
문경새재 1관문

 초점(草岾)이란 한자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억새풀 고개>가 되는데 억새풀을 줄여서 ‘새’ 라고 하고 점(岾)은 현(峴), 령(嶺) 등과 함께 고개(嶺:재)를 뜻하는 것이니 초점(草岾)을 순 우리말로 부르면 ‘새재’ (억새풀 고개 또는 풀고개)가 되는 것이다.

문경새재 2관문 가을
문경새재 2관문 가을

 새재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순수한 우리말인 새재를 한자로 표기 하는 과정에서 새(억새풀:草)를 본래의 뜻을 밝혀 적지 않고 ‘새’ 자의 음만을 염두에 두어 새(鳥)로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고개)는 당연히 한자로 령(嶺)이니 새재(풀고개)가 조령(鳥嶺)으로 변한 것이다.

 초점(草岾)이라는 한자가 순우리말인 새재(풀고개)가 되었다가 새재가 다시 조령(鳥嶺)으로 둔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명(고개) 이야기가 나왔으니 문경과 관련된 고개 이름 하나 소개해 볼까 한다.

 새재 마루에서 동쪽으로 10km쯤 떨어진 곳에 신라초기에 처음 열린 옛길인 계립령이 있다. 이 길 역시 영남과 기호지방과 연결되는 고개로서 <삼국사기 권지2 신라본기>에 아달라이사금 3년(서기 156년)4월에 계립령이 개척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계립령은 단양과 풍기를 잇는 죽령보다 2년 먼저 열려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 중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고갯길로 기록되고 있다. 백두대간에 둘러싸여 북방으로의 진출이 막혀있던 신라가 북방으로 통하는 숨통을 열은 셈이다.

 계립령은 지금은 하늘재로 불러지는 고개인데 문경 관음리와 충북 수안보 미륵리를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계립>이라는 지명은 <지릅>에서 나온 말인데 지릅이란 옛날 옷감(모시나 삼베 종류)의 재료인 대마(大麻) 또는 마(麻) 라고 하는 뽕나무과 한 해살이 풀의 거죽 껍질을 벗겨낸 속대로서 이것을 <지릅>(지릅은 이 지방사투리이고 표준어는 겨릅이다) 이라고 한다. 여름이 다 갈 때쯤이면 처음에는 흰색이든 지릅이 비를 맞으면 잿빛이 된다. 잿빛이 된 지릅을 널따랗게 펴놓은 듯한 모양이 하늘재 넘어가는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의 모습과 흡사하여 산 형상에서 따온 지릅이 고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어 지릅재가 된 것이다.

문경새재 3관문 설경
문경새재 3관문 설경

 지릅을 한자로 기록한다면 그 원형을 명확히 밝혀서 한자로 적으면 마골(麻骨)이라 표기해야 할 것이고, 의미(意味)만 쫒아서 한자로 기록한다면 마목(麻木)이라고 적을 수도 있다. 하늘재 마루에 옛날 통신수단이였던 봉수(烽燧)가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봉수대 이름이 마골점(麻骨岾) 봉수대(烽燧臺)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 라는 기록이 있다.

 지릅(또는 겨릅)을 한자로 음차를 따서 차자표기 하는 과정에서 계립(鷄立)으로 표기가 된 것 이다.

 아무튼 순수한 우리말인 지릅(표준어는 겨릅)이나, 한자인 계립(鷄立), 마골(麻骨), 마목(麻木)은 모두 다 지금의 하늘재를 이르는 말이다.

 옛날에 마골산이라 부르던 산이 지금은 포암산이라고 부른다. 포암(布巖)이란 산 정상부분의 바위가 베(布)를 널따랗게 늘어트린 형상 같다고 하여 근간(조선시대)에 부쳐진 이름이다. 산 정상부분의 바위 형상이 지릅(麻骨) 같기도 하고 베(布) 같기도 한 때문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45 열전 온달전에 계립현(鷄立峴) 이라는 지명이 나와서 그 부분을 소개 한다.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臣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溫達臨行 誓曰 鷄立峴竹嶺以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新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遂擧而窆 大王聞之 悲慟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이 아뢰기를,"신라가 우리 한강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백성들이 원통하게 여기며 늘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저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군사를 내 주신다면, 한 번 나가 싸워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 하였다.

 떠날 때 온달은 맹세하기를,"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온달은 신라 군사와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중도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평강)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소서." 그러자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문경새재 3관문 설경
문경새재 3관문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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