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인 모두의 고개 새재 <하>

이정록

문경새재 시비
문경새재 시비

 이곳 진안 삼거리에는 자연석 화강암에 문경새재 비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로 1977년 9월 경상북도에서 세웠다. 전체 높이 4.4m에 이르는 이 비석의 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비명(碑銘) 휘호를 내리신 이 곳 문경새재는 박달나무 울창했든 곳 이 고장 선비들이 청운(靑雲)의 꿈과 충효(忠孝)의 큰 뜻을 서울로 이어 나르던 옛 길이다.

 오랜 풍상(風霜)에 허물어진 관문(關門)은 옛 모습 되찾고 호젓한 산길 따라 관광도로 닦았으니 향기 어린 역사의 발자취는 길이 후세에 빛나리라.

 이 길에 다져진 조상의 얼과 우리의 푸른 슬기를 바탕으로 겨레의 새 아침은 밝아 오리니 깃들인 산새들도 끝없는 조국의 영광을 힘차게 노래하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나니 새 역사를 엮어 갈 알뜰한 정성, 줄기찬 의지를 돌에 새겨 길머리에 세우다.>

1977년 월 일

 <문경새재> 비를 세운지 1년만인 1978년 11월 25일 문경새재는 당시 대통령이셨던 박정희 대통령께서 몸소 새재를 넘는 영광을 맞게 된다. 이날 박대통령께서는 함께 수행했던 김수학 경북지사에게 새재 관문 안에는 차량 출입을 금지하도록 지시를 한 덕분에 새재는 오늘까지 차량의 통행에 따른 제반 공해를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천혜의 자연 경관과 영남대로의 옛길을 보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재길은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의 조령천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이화령이 현대식 도로인 신작로가 개설 되어 자동차가 질주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새재는 계립령으로 부터 넘겨받았던 서울로 통하는 주 통로의 역할을 이화령으로 넘겨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되었다.

문경새재 과거길
문경새재 과거길

 하지만 새재는 그때 그 시절보다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옛날 새재를 넘었던 사람들은 미투리 고쳐 매고서 비장한 각오로 넘어야 했던 고갯길이다. 그러나 지금 새재를 넘는 사람들은 한가로이 멋으로 넘는 고갯길이 되었다. 지금 재미로 새재를 넘는 사람들이 그 옛날 굽이굽이 마다 눈물을 뿌려야했던 옛 사람들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잘 다듬어진 깔끔한 길에 중간 중간 쉬어 갈수 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철따라 예쁜 모습으로 단장을 하여 지나는 길손을 반기는 새재의 품속을 산책하듯 이야기꽃을 피우며 새재를 넘는 현대인들에게 옛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맺힌 고개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겠는가. 새재는 철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길손을 반겨주는 산책로가 되어버렸다.

산불됴심
산불됴심

 새재는 고개라는 개념보다는 골짜기라는 개념이 더 어울린다. 새재는 그 깊은 골짜기에 숫한 발자국이 남긴 애환만큼이나 많은 얘기를 품고 있는 고갯길이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이곳 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게 하여 실패 하게 한 원한의 처녀귀신 얘기를 비롯하여 삼전도의 곤욕을 치러야 했던 굴욕의 시대를 살았던 최명길의 서낭당 여귀에 얽힌 얘기며 산신령과 호랑이 얘기 산적 얘기 그 외에도 많은 얘기들이 골짜기에 차곡차곡 체워져있다.

 새재의 한적한 길을 걷노라면 고운 옥색 도포를 말끔히 차려 입은 귀공자를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누구든 새재의 깊은 골짜기에 들면 사색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새재에는 시인 묵객이 아니라도 시심을 일게 하는 마력이 있다. 새재는 시 속에서 그 경치가 그림으로 다시 돌아오고 새재를 넘는 사람은 모두다 시인이 된다.

산불됴심
산불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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