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푸실 (草谷) <상>

이정록

 새재 일원에 있는 마을이 푸실(草谷)이다. 억새풀을 헤치며 마을을 처음 개척했다는 푸실은 새재와 맥락을 같이 한 마을이다. 푸실은 새재와 함께한 마을이기에 조선왕조 오백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길손을 맞이하고 또한 많은 길손을 보내야했던 마을이다.

주막
주막

 윗푸실(上草里)은 새재도립공원 정비사업으로 관문 안에 있던 마을을 대부분 이주시켜 새재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으나 아랫푸실(下草里)은 아직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연륜을 자랑하는 해묵은 느티나무가 하늘을 온통 가려 두터운 그늘을 드리우며 마을을 지켜왔고 당제인 서낭당이 있는 그래서 옛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

 현대시조 중에 이호우님의 『살구꽃 피는 마을』이라는 시조가 있다. 󰡒살구꽃 피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집을 들어선들 반겨아니 맞으리...󰡓

 푸실이 이 시조의 작품 배경이 되는 곳도 아니고 또한 푸실이 살구꽃이 많은 곳도 아닌데도 이호우님의 『살구꽃 피는 마을』이란 시조와 퍽도 잘 어울리는 마을이다.

 푸실은 전형적인 산촌마을로서 인심이 넉넉하고 푸근하여 피로에 지친 나그네의 등을 토닥거리며 반겨 줄 것 같은 그런 마을이다. 외할머니를 닮은 우리 모두의 고향 같은 그런 마을이다. 푸실은 미곡농사가 주업(主業)이었을 때는 수량이 풍부한 조령천 덕분에 가뭄을 모르는 마을 이였고, 지금은 주변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높은 산 덕분에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여 사과농사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푸실은 문경사과의 명성을 이룩하였고 그 명성을 지금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문경사과의 터전이 된 사과나무가 주흘산 자락에 눈이 모자라도록 넓디 넓게 펼쳐져 있다. 사과가 익어가는 계절이 오면 때깔고운 사과가 산등성이마다 가득하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한데 어울려 푸실엔 풍요가 넘친다.

 한입 덥석 깨물면 진한 향이 입 안 가득 느껴지는 사과의 향연(饗宴)은 주흘산 자락에만 넘쳐 나는 것이 아니다. 새재로 이어지는 마을 앞 도로변에 맛깔 서러운 사과가 직판장에 진열되어 길손을 반긴다.

 마을 들머리 큰길 옆에는 오랜 풍상을 겪은 열녀 비각이 있다. 순치 11년 8월에 세웠다는 이 비각에는 보병 조막룡의 처 열녀 윤소씨의 비가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비석 두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화강암으로 된 오래된 비는 옛것이며 현무암으로 된 큰 비석은 근년에 새로 세운 비석이다. 화강암으로 된 옛 비가 오랜 풍상을 겪어 낡고 이지러져서 문경읍 번영회 강석해 회장의 주선으로 삼창 김종호선생의 도움을 받아 1973년 11월 당시 문경읍 김창한 읍장이 세운 것이다.

 병자호란때 보병으로 출전한 윤씨부인의 지아비 조막룡이 쌍령전투에서 전사하여 윤씨부인은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딸이 가련하여 친정부모는 딸이 삼년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좋은 혼처를 구하여 개가(改家)하기를 권했으나 윤씨부인은 불경이부(不更二夫)를 고집하여 끝내 목을 매어 절개를 지켰다.

 일부종사(一夫從死)의 살신순절(殺身殉節)한 열녀 윤소씨의 넋을 기리고자 효종 8년 열녀 정문이 지금의 하초리 122-1번지에 세웠다고 한다.

 비석 전면에 새겨진 내용은 이러하지 마는 비석에 새겨진 내용과는 생판 다른 설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그 사연이 너무도 참담하여 숙연해지는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전설의 고향>에서 이 얘기가 각색되어 방영이 되기도 하었다.

 

 <열녀 비각이 서있는 그 자리에는 옛날 조막룡 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다. 조막룡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이 많은 부자였으며 결혼 한지 얼마 안 되는 선녀처럼 예쁘고 착한 부인과 신혼 재미에 빠져 꿈같은 세월을 엮어가고 있었다. 조막룡의 이웃에는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낯선 남자가 오두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혈혈단신 노총각 이였으며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팔거나 약초를 캐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

혼자 사는 노총각은 옆집 젊은 부잣집 남자가 부러웠다. 무엇보다 양귀비처럼 예쁜 옆집 남자의 부인이 눈에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부러움은 시기심으로 이어졌고 시기심이 급기야는 음흉한 계략으로 발전을 하였다.

 노총각은 조막룡에게 접근하여 조막룡이 산삼을 구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는 자기가 산삼이 나는 산골짝을 안다고 하면서 좋은 날을 잡아서 산삼을 캐러 가자고 조막룡을 유혹하였다. 산삼을 캐러 간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라나설 터이니 마을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고 둘이서만 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노총각은 산삼을 캐러 간다는 구실로 주흘산 깊은 산속으로 조막룡을 유인하는데 성공하였다.

 노총각은 조막룡을 산속 이곳저곳으로 지치도록 끌고 다니다가 미리 준비하여 둔 장소로 유인하여 커다란 바위를 굴려 조막룡을 죽였다. 그때 조막룡이가 흘린 피가 붉은 저녁노을에 비쳐 더욱 낭자하였다.

 노총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아내는 옆집 남자를 찾아가서 남편의 행방을 물어보았으나 산에 갈 때는 같이 갔으나 산속에서 서로 떨어져서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아내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남편을 기다렸으나 이미 저승으로 간 남편은 돌아올 리가 없었다.

 낮이 가고 달이 가도록 아내는 남편의 행방을 좇아 헤맷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남편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옆집 노총각은 같이 걱정을 하는 척 하면서 행방불명된 조막룡을 찾는답시고 은근슬쩍 여자에게 접근하게 시작하였다.

 조막룡의 아내 윤소씨는 옆집 노총각의 도움을 받으며 남편의 행적을 찾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남편의 행적을 찾기는커녕 옆집 노총각의 계략에 넘어가 그와 함께 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십 수 년이 훌쩍 지났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까지 셋을 두어 그럭저럭 살아갔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어느날 윤소씨는,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든 지금의 남편으로부터 전남편인 조막룡을 주흘산 깊은 산속으로 유인하여 바위를 굴러 죽였다는 엄청난 애기를 듣게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여인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의 남편에게 속아 지금까지 불륜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을 통분해 하며 지금의 남편을 문경 관아에 고발하여 처형당하게 하고 낳은 자식들도 악의 피를 받은 씨앗이라고 모두 죽이고는 자신도 목을 매어 자결하여 늦게나마 억울하게 죽은 남편에게 속죄 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문경 관아에 알려져 문경현감이 그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윤씨 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열녀 윤소씨의 무덤이 있는 소밭등 이라는 곳이 있으며 조막룡이 바위에 깔려 죽어있는 응기뚱 이라는 곳도 주흘산 깊은 산속에 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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