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음직스런 아카시

고 순 덕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그 땅은 여기가 거긴가!아카시아 흰꽃이 바람에 날리니고향에는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골목에서 고무줄 꾀나 하던 때 부르던 노랫말이다. 노랫말이 제대로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오늘 시내를 내려가며 길 가에 나뭇가지 늘어지게 핀 아카시 꽃을 보고 생각난 노래고, 종일 입안에 맴돌아 흥얼거렸다. 꼬마나 수미가 있었다면 분명 큰소리로 함께 불렀을 거다.

 고향땅이 부터 여기가 거긴가 까지는 먼저 고무줄 이쪽에서 찍고 한발 한발 나누어 고무줄을 넘었다 되돌아오지만, 아카시아 흰꽃이 부터는 한발씩 나누어 건너긴 하되 빙글빙글 돌면서 정점을 찍었다. 노래가 끝나면 어질어질. 잠시 쉴 겨를도 없이 죽은 친구를 다시 살리고 단계를 높이기 위해 한번 더!!! 한번 더는 주로 꼬마의 담당이었고, 굴욕스럽지만 난 죽은자.

 
 

 가정의 달 5월이 온통 싱그러운 초록과 갖가지 꽃향기로 가득하다. 그 중에도 모내기로 한창인 지금은 장독대와 창틀, 온 세상을 노란 눈으로 뒤덮은 송화와 스르르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하게 하는 아카시가 만개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에 과수원길.

과⦁수⦁원 기일~~~

 고향하면 많은 모습과 향기가 떠오른다. 그 중에도 요맘땐 뒷밭 언덕배기와 야산에 지천이던 버선코 같은 하얀 아카시가 그 중 으뜸이다. 추억속의 아카시는 멀고 배고프던 하교 길 먹거리였고, 놀잇감 이었다. 누군가 문득 탐스럽게 핀 길가의 아카시를 보고,

“고놈 참 맛나게 폈네. 먹고 싶다!”

“먹고 싶어요? 옆사람한테 먼저 먹어보라 하고, 본인은 며칠 뒤에나 그 사람의 상태를 보고 먹어도 따 먹어요.”

한바탕 웃었지만 현실은 슬픈 이야기다. 농약살포에 미세먼지까지 아카시 꿀은 안전한 건지?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층으로 계단을 오르면 첫 교실이 우리 반이었다. 그리고 교실 바로 옆에 현관 위를 덮는 난간이 있었다. 창틀을 타고 넘으면 그 난간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거기에 동네 느티나무만큼이나 큰 아카시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그 곳으로 넘어가면 향긋 달달한 아카시 꽃을 쉽게 따 먹을 수 있었다. 쭈욱 한웅큼 훑어서 먹는 친구를 보며

“야! 니는 그걸 더럽기 다 먹나? 꼭지는 띠고 꽃만 먹어야지......”

“이기나 그기나.”

 하는 친구에게 깔끔한 척 우아를 떨며 아카시 꽃을 따 먹었다. 잎줄기는 통째로 따서 이파리 떼어내기 가위 바위 보를 하기도 했고, 마지막 줄기로는 반 꺽어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파마를 하기도 했다. 큼직한 가시는 굵은 가지에서 떼 내어 침을 바르고 코에 붙여 코뿔소나 유니콘을 흉내 내며 깔깔거릴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산림을 녹지화 한다는 명분하에 한번 뿌리내리면 순식간에 번지고, 없애기 힘들다는 아카시를 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땔감으로도 유용했던 이 아카시 나무는 60년대 사방용 나무로 식재되었고, 80년대 산림 녹지화에 성공하게 되자 과연 아카시 나무는 우리에게 이로운 나무인지 해로운 나무인지에 대해 논란꺼리가 되어 벌목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많은 양봉인들의 고수익을 위한 매개체이며, 목재로도 활용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 해 전에는 붉은 아카시가 나를 놀라게도 했다. 붉은 아카시. 그럼 노랫말도 일부 바꾸어야 하나?

 
 

 5월, 모내기철, 고향하면 떠오르는 꽃 아카시.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엔 아카시 꽃 대신 아카시아껌을 씹으며 돌아왔다. 지긋이 눈감아야 느낄 수 있는 달달한 고향의 맛, 고향의 향기. 그 향기를 타고 곧 뻐꾸기도 울어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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