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청운(靑雲)의 꿈 과거(科擧)길 <하>

 

영남의 유생들은 식년시를 비롯하여 각종 별시를 치루기 위하여 수도 없이 새재를 넘어야 했다.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에 올라가서 과거에 응시했던 많은 유생들의 소망이 모두 다 이루어 질수는 없었다. 과거급제의 영광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실현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새재를 넘었던 많은 유생들은 낙방이라는 쓰라림을 가슴에 안고 낙향 할 수밖에 없었다.

추풍령이나 죽령을 넘지 않고 새재를 넘어 과거길에 올랐던 영남의 유생들은 귀향길에도 추풍령이나 죽령을 넘지 않고 새재를 넘어 귀향 하였다. 과거급제의 미련을 평생토록 버리지 못한 것처럼 문경새재를 넘는 것도 포기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동 출신 유우잠(柳友潛)은 과거 시험에 낙방을 하고 귀향 하면서 새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지난 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유우잠은 수차 과거시험에 응시를 했지만 이때마다 낙방하고 말았다. 유우잠은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 유직(柳稷)이 인조 8년(1630년) 진사에 입격한 것으로 위안을 삼고 살아야 했다.

예천의 천석군 부자인 박득령도 과거를 보러 부지런히 새재를 넘었지만 급제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득령은 그의 일기 「저상일월」에서 “선비가 비록 낙방 하더라도 슬픈 마음이야 가질 수가 없지 않은가!” 라는 마음가짐으로 귀향을 하였고 자기는 비록 낙방을 하였지만 새재를 넘은 영남의 유생들이 이번 과거에 많이 입격을 하였으니 자기도 새재를 부지런히 넘다보면 언젠가는 급제를 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 오백년이 흐르는 동안 영남의 유생들은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수도 없이 새재를 넘나들었다. 자신의 영달은 물론 가문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과거를 통하여 이 땅에 선비정신을 뿌리내리고 사림정치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평생토록 새재를 넘어 청운의 꿈을 펼치려 했다.

초곡천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새재-.

골짜기를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가 가슴을 적셔주는 새재-.

지금도 새재의 이런 호젓한 옛길을 가노라면 큰 갓에 물색 고운 도포를 단정히 차려입은 선비를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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