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초곡성(草谷城)과 주흘관(主屹關) <상>

이정록

 

 문경새재가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이 새재 말고도 여러 갈래 있으므로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하여도 조정에서는 새재에 관방(關防)의 설치까지는 염두에 두지를 않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선조26년 6월(선조실록 권39 6월 무자조) 당시 구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명나라 장수 경락과 유원회 등이 신립장군이 조령과 같은 험로를 버리고 충주에서 적을 맞아 실책한 예를 들어 새재에 설관(設關)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새재의 관방 설치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 명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거론 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전란중이라 물자의 조달 및 인력 동원 등의 어려움으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의견만 분분하였다.

 
 

 선조26년 11월(선조실록 권45 11월 갑오조)당시 내각을 이끌고 있던 서애 유성룡이 고구려가 당을 물리치고 고려가 거란을 몰아낸 것은 성곽을 굳건히 하고 그 성곽을 잘 활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는 고사를 들어 조령은 나라의 출입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하는데 조령에서 막지 못하면 충주가 함락되어 송강(松江) 수백리가 모두 적에게 유린됨은 물론 도성도 온전치가 못하다고 강조하며 지난날 신립장군의 패배가 그 증거임을 들어 새재에 설관할 것을 주청하기에 이러러 새재의 설관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충주사람 신충원이 조령의 지세와 관문 설치 및 설관 후 파수계획 등을 세밀하게 상주하였고, 선조27년(서기 1594년 2월) 신충원으로 하여금 조령 영상(嶺上)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와서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고 가운데는 개울물이 흐르는 응암(鷹岩)이라는 곳에 최초로 성을 쌓게 하였는데 조령 설관의 시초인 지금의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이다.

 
 

 신충원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바위를 깨고 골짜기를 파내는 등 성터를 닦아 공사를 시작한지 8개월만인 그해 10월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3년 후인 선조30년(서기 1597년) 년 초에 충주목사였던 김명윤이 감독하여 조령 영상에 석문을 세우고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성을 구축하니 지금의 조령관(鳥嶺關)과 조령성(鳥嶺城)이다.

 당시 조령성은 영상의 안부만을 겨우 막았을 정도로 성이라고 이름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소규모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가 제차 침공을 한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조령을 지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새재의 성곽은 적의 침공을 막아내는 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성곽은 퇴락해갔다.

 병자호란이라는 또 한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다시 조령에 축성의 필요성이 거론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인조16년(서기 1638년) 3월 이경여가 상소를 올렸는데 “조령 남쪽에 산성이 하나 있는데 이름을 어류라고 합니다. 형세가 험하고 견고함은 남한산성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동쪽과 남쪽은 만(萬) 길이나 되는 절벽이라 새나 짐승도 넘기 어려우며 여기에 성을 쌓으면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성안에는 샘물과 시내가 여러 갈래로 흐르며 수목이 꽉차있어 천 칸의 큰 집을 지을 수 있으며 그 안에는 4~5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도 있고 조금만 수축하면 식량과 마초를 저장하여 영원히 함락 할 수 없는 기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인조실록 권36 16년 3월 무진 조)

 
 

 임진왜란 때 거론된 조령의 축성은 왜적이 소백산맥을 넘어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는 정도의 개념 이였다면 병자호란 이후에 조령의 축성은 길목을 차단하는데 만 그치지 않고 새재 골짜기를 하나의 완성된, 즉 거대한 성으로 구축하자는데 중점(重點)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효종 때부터 북벌정책을 추진한 핵심 인물인 수어사 이완이 헌종14년 2월에 “조령이 적을 막을 만한 곳이니 성을 쌓아 영진을 설치하여 남한산성에 소속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한다면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아예 조령에 진을 설치하여 군사를 상주시킬 것을 주청하였다.(헌종실록 권21 14년 2월 경오조)

 하지만 성을 구축하는 일이 상당한 인력과 막대한 물력이 소요됨은 물론 부차적으로 성의 보수 및 유지가 따라야하기에 조령의 축성은 쉽게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숙종29년 4월에 연풍현감 이만형이 상소하여 “신원에서 석문까지는 약 10리 인데 아주 험준하므로 남북을 막아 성을 쌓으면 10만 명을 수용 할 만한데 도적이 오면 군사를 데리고 들어가 지키고 도적이 물러가면 군사를 흩어서 밭을 갈아 곡식을 심어 양식을 저장하며 험한 곳을 막고 요새를 지키는 계략으로 삼으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숙종실록 권38 29년 4월 병자 조)

 앞서 이경여의 상소에는 조령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만형의 상소에는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경여는 2관문과 3관문 사이의 면적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고 이만형은 새로 신축해야 할 지금의 초곡성인 1관문에서 3관문까지 새재 골짜기의 모든 영역을 내포하였기에 이 같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이만형의 상소가 있었던 5년 후인 숙종34년 11월 당시 예조판서였던 이인엽이 조령의 축성문제를 거듭 상주하여 숙종께서는 내년 봄에 조령을 비롯한 추풍령, 팔량치, 운봉 등에 축성할 것을 윤허하여 조령의 축성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왔다.(숙종실록 권46 34년 무자 11월 임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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