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초곡성(草谷城)과 주흘관(主屹關) <하>

이정록

 

 숙종35년 서기 1709년 당시 문경현감 이중창과 경상감영의 비장 손명대가 새재에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축성 공사를 하였는데 지금의 주흘관과 초곡성이 이때에 그들에 의하여 쌓아졌다.

주흘관
주흘관

 조령산성의 동문에 해당되는 달매기골 막바지에 쌓은 동암문과 성곽 705m,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북야문골 끝자락에 축조된 북암문과 성곽 350m도 모두 이 때에 축성되었고, 임진왜란 전란 중에 쌓았던 2관문과 3관문의 성곽도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지고 허물어진 것을 이때에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난공불락의 거대한 조령산성이 비로소 탄생을 한 것이다.

 초곡성은 주흘산 자락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동벽 780m, 조령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서벽 1320m로서 도합 2km가 넘는 산성이다.

고지도20광여도
고지도20광여도

 계곡 부위의 평지 성(城) 중간쯤에 높이 3.6m, 너비 3.4m, 길이5.4m의 홍예문을 두어 영남대로가 초곡성의 성문을 통과하도록 하여 새재를 넘는 모든 사람은 초곡성의 성문인 홍예문을 통과 하게 되어 있다.

 초곡성의 성문인 홍예문 위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팔짝 기와지붕에 좌우 협문이 한 개씩 있는 문루가 있는데 문루 앞쪽에는 주흘관(主屹關)이라는 현판이, 그리고 문루 뒤쪽에는 영남제1관(嶺南弟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여지도
여지도

 세 개의 관문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하여 이 관문을 통상 제일관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주흘관은 1752년, 1772년, 그리고 1840년 3차례에 걸쳐 증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1907년 구한말 정미의병 당시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져 완전 소실된 것을 1922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흘관이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관문이고 또한 이 관문이 우리들과 가장 친숙해져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초곡성을 처음 쌓은 것이 주변의 잡석 따위로 허술하게 축조를 하였던지 축성 3년만인 숙종38년 성이 절반가량이 무너졌다고 <숙종실록 권51 38년 5월 정해 조>는 기록하고 있다.

“근년에 성을 쌓은 것이 견고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수마석과 조각난 작은 잡석 따위로 쌓았기 때문에 장마 비를 맞아 손상되고 터지는 곳이 많아 몇 해를 지나 무너진 곳이 절반이 넘습니다. 일을 관장한 두 사람의 상(賞)내린 것을 거두고 논죄하여야 마땅합니다.”라고 서종태가 주장하여 현감 이중창과 영비 손명대는 파직되고 죄를 받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주흘관 좌우 성벽에 성을 개축한 각기(刻記)가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성벽은 그 후에도 수차 보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축 각기에 도석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처음 성을 쌓았을 때와는 달리 개축이 거듭되면서 전문 석수를 기용하여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도 알 수가 있다.

 초곡성 서벽 쪽을 흐르는 조령천과 여궁폭포 쪽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성 밑을 통과하는 부분에는 수구를 만들어 물은 흘러가되 인마는 성 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또한 개울물을 성 앞쪽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자연적인 해자(垓字) 구실을 하도록 설계하여 성으로서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난공불락의 성을 구축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숙종실록 권55 40년 7월 임자조」에 의하면 영남지방을 순찰한 어사 여광주가 “조령산성은 요충지에 해당되어 국가의 승패에 관계되는 곳이니 도성을 보수하는 규정과 같이 허물어지면 즉시 굳게 수축하여야 한다.” 는 상소를 올렸다. 어사 여광주의 상소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조령의 방어를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쌓은 초곡성은 수차 보수를 거쳐 완벽한 성곽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적을 막아내는 성으로서의 본래 기능은 한 번도 수행하지를 못하였다.

 초곡성이 성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는 못하였지만 문화유산으로서 문경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세 개의 관문과 부속 성벽이 1966년 3월 21일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79년 5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한국 제일의 관광지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초곡성과 주흘관을 비롯한 사적지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흘관과 초곡성은 새재의 얼굴이자 문경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문경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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