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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고 잊혀가는 애국지사 "금암 윤만식(琴嵓 尹萬植)"이기운(李基運) 작
배영진 기자  |  tobyj@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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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6.03  23: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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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지지 않고 잊혀가는 애국지사=

    “금암 윤만식(琴嵓 尹萬植): (1857~1927)”

선생의 호(號)는 금암(琴嵓), 자(字)는 하서(夏瑞)이며, 1857년, 정사년(丁巳年) 8월에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 봉화군(奉化郡) 재산(才山)의 유학자이며, 본관 파평(坡平)의 소정공(昭靖公) 3방(三房), 영천부원군파(鈴川府院君派), 전 부위(副尉) 통정대부(通政大夫)이셨던 휘(諱) 영(泳)의 차자(次子)로, 시조 후 30세손으로 출생, 성장하였으며, 향리 인근, 재산(才山)의 반천서원(盤泉書院),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 등지에서 공부했다.

 

1875년, 을해년(乙亥年), 18세에 이웃 고을 영양(英陽)의 만석꾼 부자인 김해김씨(金海金氏) 가문의 규수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23세가 되시는 1880년, 경진년(庚辰年)에 등과, 출사하여, 이른바 구한말인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초기를 거치면서 1882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겪었고, 1897년, 정유년(丁酉年)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개국이 되었고, 이듬해인 광무2년(光武2年)인 1898년, 무술년(戊戌年), 41세에 한성부(漢城府) 참위(參尉), 통훈대부(通訓大夫)에까지 이른 후 관직을 끝으로 고향인 봉화(奉化)의 재산(才山)으로 귀향, 반천서원(盤泉書院)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인하여 유학자 중심으로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이 전개됨에 따라 재산이 많은 만석꾼 처가인 김해김씨(金海金氏) 가문의 도움과 봉화(奉化)지역의 대대로 물려받은 가산을 정리해 가면서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의 재정 지원을 했으며, 그 후 보다 지원활동의 접근성이 쉬운 이웃한 고을, 영양(英陽)과 영덕(盈德)의 접경지대인 맹동산(孟東山) 자락으로 이주,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택전리(宅田里)의 금조암(琴鳥巖) 또는 현암(玄巖)이라고 하는 이른바 금새바우 마을에서 거주하면서 활동하였으며, 1927년, 정묘년(丁卯年) 5월에 향년 일흔(70세)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같은 금새바우 마을의 고운 분가루가 담긴 분통이 있다는 전설이 있는 분통곡(粉桶谷)에 소재하고 있다.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택전리 금새바우(금조암),분통곡 선영

 

후예로는 외아들 현은(顯殷) 공과 두 명의 딸을 두었으며, 외아들 현은(顯殷) 공은 절강편씨(浙江片氏) 부인과의 사이에 맏손자 범오(範五) 공을 비롯하여 채오(採五), 상오(尙五), 문오(文五) 공 등 7남 4녀의 많은 손자 손녀를 두었고, 증손자 대에는, 석태(錫泰), 석형(錫衡), 석웅(錫雄), 석홍(錫弘) 공 등 남자 손자만 21명, 고손자 대에서는 2019년 현재 75세인 맏고손자 정원(政源) 공을 비롯하여 수원(守源), 상원(尙源), 홍원(弘源), 국원(國源), 광원(光源), 장원(壯源), 부원(富源), 철원(喆源) 등 많은 고손자와 그 후손들은 고향 근동뿐만 아니라 국내를 벗어나 전 세계로 흩어져서 학계, 정계, 법조계, 경제계에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며 조상의 뜻을 받들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구한말,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태백산, 소백산 지역에서 유학자 중심으로 일어나던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에 쓰인 자금의 조달은 대대로 물려받은 상속분과 만석꾼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처가에서 상속받은 재산 등으로, 영양(英陽)지역의 김도현(金道鉉) 의병장, 봉화(奉化)지역의 조광보(趙光補) 의병장,  청송(靑松)지역의 심성지(沈誠之) 의병장,  안동(安東)지역의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의병장  등과 친분을 유지하며,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특별히 사제(師弟) 간으로 돈독한 친분이 있었던 본명이 신태호(申泰浩)이신 평산신씨(平山申氏) 가문의 영덕(盈德)지역의 신돌석(申乭石) 의병장의 활동에는 근동의 가산을 처분, 정리하면서까지 많은 지원 하였다고 한다.

 

1918년, 무오년(戊午年)에 크게 유행했던 ‘무오년 독감’이라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만연했던 ‘스페인 독감’으로 인하여 만석꾼이었던 영양(英陽)의 김해김씨(金海金氏) 처가 식솔의 전멸 위기의 큰 인명 피해로 남긴 재산 모두를 상속받으면서도 만석꾼의 지위를 누리지 않고,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했으며, 이후 본격적인 일제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었을 때는 안동(安東) 의성김씨(義城金氏) 가문의 척암 김도화(拓庵 金道和),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의병장을 통하여 친분이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선생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 시 국내에서 자금의 모금과 재정 지원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고 한다.

 

선생이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한 것은 대다수의 고향 근동 지인들은 알고 있었지만, 1927년에 작고할 당시 당신께서 해온 일을 알리거나 자랑하거나 하지 말라는 ‘절대적 유언’을 자손들에게 남겼으며, 이후 외아들인 현은(顯殷) 공은 그 ‘절대적 유언’을 대대로 받들어야 한다며, 아름다운 선생의 활동을 집안 내에서만 전하며 외부로는 알리지 않았으며 이때까지 그 뜻을 이어 왔다.

그러나 영덕(盈德)의 평산신씨(平山申氏) 가문과 안동(安東)의 의성김씨(義城金氏) 가문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여러 차례 국가유공자로 신청의 뜻을 전해왔으나 가문에서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로 하고, 신청하지 않고 이어왔으나, 2007년에 개관한 안동(安東)의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獨立運動紀念館)에서 2015년경에 고문서를 정리하다가 선생의 휘(諱) 자를 찾아내어 가문을 찾아 알려왔고 국가유공자로 신청하라고 했지만, 집안 어르신들의 뜻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널리 알리지 말라는 뜻이 완고했다고 한다.

 

1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선생의 자손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지도자급 인사로 살면서 5~6대나 지난 일이라 생각하고 선생의 바른 뜻을 가내에서만 기리며 이어왔으며, 생존해 있는 증손자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다만, 고손자, 현손 대에 이른 2019년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가의 어떠한 특혜를 원하거나 바라지는 않지만, 선생이 구국, 애국 활동을 했다는 표증을 남기고자 할 뿐이며, 구국과 애국 활동을 한 많은 선각자의 자손들이 선조 대의 선행으로 복덕을 받아 번창하길 바라면서 국가를 위한 구국, 애국 활동을 하는 것이 자손들에게 큰 복덕이 될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함에 있어 이 글을 써서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자 할 뿐이다.

 

 

                             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에 즈음하여)

 

                                      이기운(李基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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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嵓 尹萬植 先生(금암 윤만식 선생)”

 

義兵活動分財助(의병활동분재조)

身盡蒐金爲國守(신진수금위국수)

功績未誇彰自世(공적미과창자세)

子孫四海似星稠(자손사해사성주)

(七言絶句, 己亥年 三月, 桑谷 李基運 謹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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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 윤만식 선생”

 

의병 활동에는 재산을 나누어 도왔으며

몸을 다해 나라 지킴을 위해 모금하였네.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드러나고

그의 자손들은 사해에 별처럼 많구나.

(칠언절구, 기해년(2019년) 3월, 상곡 이기운이 삼가 지어 올림)

 

☆☆☆☆☆☆☆☆☆☆☆☆☆☆☆☆☆☆☆☆

글쓴이: 이기운(李基運),
        호(號)는 상곡(桑谷), 전, 서강대학교 교수, 공학박사, 유학자, 수필가
        자유기고가, 시인(시, 시조, 한시, 영시), 향토 역사가

        1937년 6월: 충남 예산에서 출생,
        1958년~1963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전자공학)
        1963년~1966년: 육군 장교로 병역의무
        1966년~1972년: ㈜ 삼성전자 선임연구원
        1973년~1978년: KAIST 대학원 졸업(전자정보통신공학)
        1979년~2002년: 서강대학교 교수
        1998년~2002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졸업(문예 창작콘텐츠학과)
        2003년~2012년: 정년퇴임, 예산(禮山)으로 귀향,
                        예산향교(禮山鄕校)의 전교(典敎), 장의(掌儀)
        2015년~2019년: ‘독립운동가발굴조사단’ 일원으로 활동: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굴되지 않은 의병, 구국 및 애국 운동 활동자 발굴)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및 구국 활동 중심-
        2023년 1월: 노환으로 수 85세로 별세


  
   
▲ 이기운

글쓴이는….

대학교 교수로서 교단에서 전공 부분인 전자공학에 관하여 연구, 강의, 지도를 통하여 학계에서 활동했으며, 독학으로 한국사(韓國史), 향토사(鄕土史), 문예사(文藝史), 중국과 한국의 고전(古典), 한서(漢書), 한학(漢學), 한문(漢文)과 한자(漢字)에 관하여 지식을 터득했고, 시인, 시조 시인, 수필가, 한시 시인, 영시 시인, 향토 역사가로 각종 문예지를 통하여 등단했고, 회갑의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 창작콘텐츠를 공부했으며, 문예 창작에 활동 중,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발굴조사단’ 일원으로 활동함

 -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의병, 구국 및 애국 활동에 참여했지만 알려지지 않고 잊혀가는 애국지사 발굴 조사에 참여 -. 

 

영남투데이는 현충일을 맞아 잊혀가는 독립운동가를 찾아 첫번째로“금암 윤만식”선생을 소개하기로 하고 선생의 유언에도 알리지 말라고 하였으나 후대 우리들이 이름석자만이라도 기억하고자 기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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