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 운곡리 청간정(1)

                                                                                                               김정찬

김정찬
김정찬

오랜만에 답사를 나섰다. 상주고등학교에서 출발하여 좌회전한 다음 동아아파트를 지나 농협예식장을 왼쪽에 두고 철뚝을 건너 거동으로 가는 길을 달렸다. 남천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갔다. 독자는 지금 어떤 집안을 찾아가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풍양조씨 집안이다. 이 집안은 약 200여 명이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집안이다. 상주 또한 풍양조씨가 세거한 곳이다. 주로 낙동면이다. 그곳엔 지금 양진당, 오작당, 청간정 등 풍양조씨를 대표하는 건물이 있다. 물론 지금도 이 시대를, 또 상주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이 세 군데 가운데 어디로 가려고 마음먹고 나왔을까?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적게 알려진 곳이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자연에서 지낸다는 의미의 이름인 청간정이다.

 굴티재를 넘어 한참을 가다가 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길목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내려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밭 사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저 멀리에는 국사봉이 있고 가까이에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모두가 옛날 집밖에 없다. 전통마을이다. 우리는 이곳을 雲谷里라 부른다. 구름 낀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운곡리의 유명한 건축물은 의암고택과 청간정 등이 있다.

청간전 전경
청간전 전경

 오래 전에 이곳에는 운곡이라는 호를 가진 분이 살았다. 그 이름은 바로 조학경이다. 그의 가계를 보면, 조학경->조헌기->조진윤->조예->조기원->조정->조광헌->조윤영->조숭->조사충[호군공] 등으로 올라간다. 조윤영이라는 분은 호가 만은晩隱이다. 이 어른이 상주에 오시면서 지금의 운곡 마을이 있게 된 듯 하다.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상주지역의 풍양조씨는 대개 호군공파이다.

 조학경의 조부가 조진윤인데 이 분은 호가 용슬헌容膝軒이다. 청간정은 이 분과 관계가 있다. 호는 자기 자신의 이상이나 꿈, 삶의 가치, 고향마을 등이 드러나게 짓는데, 특히나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분의 용슬헌이라는 호는 정말 양반집안의 점잖은 마음을 표현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작은 헌람[공간]이라는 뜻으로 호를 지었으니 그 얼마나 겸사의 말인가?

청간정 현판
청간정 현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주지역의 대표적인 풍양조씨 인물은 바로 검간 조정이다. 이 분의 맏아들이 조기원이고 그 분의 맏아들이 조예이다. 가곡 조예라는 분의 둘째 아들이 용슬헌 조진윤인 것이다. 청간정이라는 공간은 전국을 망라하면, 많은 곳에 청간정이라는 선비들의 삶의 공간이 있다. 우리 상주에도 두 군데나 있다. 그러면 이곳의 청간정은 지금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 시대에 와서 옛날의 건물이 유명할 수 있는 근거는 무언인가? 우선 그 건물과 관계된 뛰어난 인물이 있어야 하고, 또 그 건물의 건축년대가 오래 되었거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필자의 입장에서, 운곡의 청간정이 주목을 끄는 것은 곳곳에 걸려있는 편액 때문이다.

 청간정에는 조씨가숙, 청간정, 익암서당이라는 편액글씨가 있다. 청간정은 초서로 쓴 것과 전서로 쓴 것이 있고, 나머지는 전서로 썼다. 이 집안 어른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이 글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핵심은 이 편액 글씨가 과연 미수 허목의 친필이냐 하는 여부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청간정을 지은 분이 아버지인 조예냐, 아들인 조진윤이냐 하는 것이다.

청간정 현판
청간정 현판

 모든 것은 정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청간정을 지은 분이 누군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청간정기, 운곡세장기, 그리고 조진윤 행장 등이 있었다. 조유경이 쓴 청간정기는 내용이 다음과 같아 별다른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정자의 이름이 청간정인데 '청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자를 간수 곁에 지으니 정자에 오는 사람들이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자에 오는 사람들이 물소리를 자연히 듣게 되겠지만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는 듣지 못 한다면 어찌 이 청간이란 이름이 이 정자에 어울리겠는가? [이하생략]

 용슬헌 조진윤의 손자인 취지재 조위경이 쓴 운곡세장기에는, ‘운곡리는 갑장산 아래 낙동강가에 있다. 골짜기는 맑고 길며 동네는 넓으니 군자들이 살만한 곳으로 그 명칭은 주자가 살던 곳과도 부합된 신기하고도 다행스럽다. 옛날에 우리 직장부군께서 한양에서 남쪽으로 오셔서 이 마을을 선택하여 동산에는 큰 대나무와 소나무를 심고 서재에는 도서를 두고 지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한다. 3세를 지나 선조인 검간 선생이 요포에 양진당을 짓고 옛 마을은 長房에게 주고 次孫 연천공은 나중에 종숙부에게 出系하여 그 전지를 모두 우리 조부이신 용슬헌 부군께 드리게 되니 이를 받아서 더욱 공경하는 마음을 더하고 지극정성으로 보호하여 뜻을 이어 지켰다. 마을 옆에 청간정을 짓고 형제 여러분과 성현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그 즐거움을 더했고, 은행나무와 오동나무를 심고 그 사이에서 소요자적하며 골짜기 물 서쪽에 집을 하나 짓고 이름을 ‘익암서재’라 하였다. 청간정이라는 세 글자와 익암서재와 조씨가숙이라는 8자는 문정 선생께서 직접 전서로 써서 편액을 만든 것이다.‘라 하여 청간정, 익암서재 그리고 조씨가숙은 미수 허목이 쓴 글씨라고 밝히고 있다. 필자가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지금도 집안에 그 당시의 원본인 紙本墨筆이 있다고 한다. 만약 이 원본이 있고, 그 원본의 글씨와 편액의 글씨가 동일하다면, 운곡세장기의 내용으로 보아 3가지 편액이 미수 허목의 글씨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증명이 된다면, 청간정은 건물의 역사적 의의와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지게 되고, 더 나아가 풍양조씨와 상주유림의 명성을 높이는 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청간정 건물의 오래된 연대와 독특한 양식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지, 편액이 미수 허목의 글씨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미수 허목이 워낙 출중한 인물이었고, 대표적 남인이었으며, 조선 최고의 전서 전문가이었기에, 이 편액이 더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청간정
청간정

 그러면 청간정은 누가 지었느냐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 청간정 앞에 있는 문화재 시설 안내판을 보면, ‘청간정은 가곡(柯谷) 조예(趙叟)가 1650년경에 건축한 건물이다.’라 하고 있다.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 안내판이다. 하나는 ‘가곡 조예가 건축한 것이냐?’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예(趙叟)’라고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청간정이 조예라는 분이 세운 것이라고 안내판에 표기한 것은 상산지에 기록된 사실을 참고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운곡세장기에는 조예의 아들인 용슬헌 조진윤이 세운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또 류주목이 쓴 용슬헌 조진윤의 행장에도 ‘만년에 서재를 세우고 성현의 책을 쌓아두고 여러 형제분들과 함께 소요하고 공부하며 심심을 맑게 하여 세상일에는 초연하게 벗어나 있게 되었는데 그 서재이름을 청간정이라 했다.’고 한다. 만년에 서실을 세웠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 이 분이 1635년 출생이므로 안내판에 기재된 1650년 건축이라는 문구와 조예가 세웠다고 하는 문구는 오류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면 상산지와 집안에서 내려오는 문집의 내용 중 어떤 것에 더 신뢰성을 두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어떤 사실을 부풀리려는 성격의 내용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이 부분은 집안의 기록에 더 신뢰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필자는 상산지의 오류를 몇 가지 알고 있어서 그런지 청간정의 설립자는 집안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예(趙叟)라는 문구의 적합성 여부는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될 것이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낙동면 운곡리의 청간정은 지금 안내판으로는 다소 미흡하다는 것이다. 자세히 아는 사람이야 괜찮겠지만 타지에서 상주의 양반집안을 알아보기 위해 들리는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 것이다. 누군가가 명확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역시 상주의 최고 가문 중 하나가 풍양조씨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상주지역 역사인물이 남긴 문집이 대략적으로 1,000여 권이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 풍양조씨가 10%는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집안 내력과 상주역사를 논할 때 문집을 빼고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풍양조씨 집안의 문집을 구해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정찬  

 상주인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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