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선생 묘갈문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관련 키워드 : 형제급난도, 체화당, 도남서원, 존애원, 연악문회록, 임술범월록

  월간(月磵) 이전(李㙉)은 흥양이씨로 1500년대 중기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 상주의 청리에 살았다. 월간이라는 호는 ‘달빛 어리는 계곡’이라는 의미이다.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

지금 수선서당이 있는 청상 저수지 일대에서 살다가 나중에 닭내[가천리]로 옮겨 살았다. 지금 닭내에 가면 체화당[자손번성을 의미하는 집]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그가 살았던 흔적이다.

 동생인 이준, 나이는 적지만 친구같이 지낸 우복 정경세, 갑장산의 연악구곡을 설정한 남계 강응철과 이웃 마을에 살았고, 성향도 같았으며, 같은 스승 아래서 동문수학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자, 사람들은‘상산사호[상주에 살면서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4명]’라 불렀다. 이들은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갑장산 일대에서 지내면서 상주지역의 리더역할을 하였다.

체화당
체화당

1622년에 연악산[갑장산]과 낙동강에서 문회를 열어 상주의 품격을 높였고, 또 도남서원을 창건하여 도내에서 위상을 제고하였으며, 임란 때는 의병활동을 하여 구국활동을 펼쳤고, 외남에 존애원[사설 의료원]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는데 이것이 그 대표적인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존애원
존애원

 월간 이전은 <월간집>을 남겼는데 근세에 와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또한 흥양이씨 집안의 가계를 정리하기 위해 집안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들의 행장, 신도비명, 묘갈명, 가장 등을 모아 <흥양이씨세보>라 명명하고 필자가 번역하여 집안에서 출간하였다.

 흥양이씨 집안의 선봉이자 당대 큰 어른이었던 월간 이전을 알리기 위해, 판중추부사 조경이 쓴 묘갈문을 소개한다.

 공의 이름은 전(㙉)이고 자는 숙재(叔載)이며 호는 월간(月澗)이다. 9세에 글방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고 16세에 밀운불우(密雲不雨)라는 제목의 부를 지어 서원과(書院課)에 장원을 하니 권문해라는 분이 문장과 글씨뿐이 아니라고 감탄하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만력 경진년(1580년)에 서애 유성룡 선생이 상주군수로 부임하자 공의 형제가 예물을 갖추고 배움을 청하여 마침내 퇴계 학문의 계통에 들었다. 이때부터 주자절요를 정밀하게 강구함을 맛있는 육류를 가지고 입을 즐겁게 하는 것 이상으로 즐겼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무신년에 영남 사림에서 5현을 문묘에 모시고 제사 지낼 것을 요청할 때 공이 소두(疏頭)가 되어 윤허를 받았다. 조금 뒤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마와 독우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계해년에 인조대왕이 반정하여 기로의 석학들을 등용할 때 공은 지례의 현감으로 제수되었다. 그의 다스림이 사랑으로 어루만짐을 돈독히 하였고 조세를 독촉하는 것을 게을리 하니 이것 때문에 허물을 얻기도 하였으나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두 번째 소를 올릴 때에는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그림같이 조리있게 아뢰어, 왕께서는 후한 비답을 내리셨다. 그러나 끝내 유사들의 저지를 받자, 공께서 한탄하기를 “내 뜻이 실행되지 않거늘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 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니 읍민들이 떠난 공을 추모하여 노래를 불렀다.

 공은 말년에 청효현[지금의 청리면]의 계곡 위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그 곳를 거닐며 그윽한 정취를 즐기시면서 경(敬)에 대한 공부를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으니 ‘도를 즐기고 근심을 잊는 군자’라 할 만하였다. 무자년 윤 3월 13일 무인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가정 무오년에 태어나서 무자년까지 살았으니 향년이 91세였다. 이 해의 5월 묘일에 청리의 정향 언덕에 장사 지내니 모인 유학자들이 백여 사람이요 학궁이 서로 부의를 보내기도 하였다.

 공의 사람 됨됨이는 키는 크고 옥 같은 외모에 늙어도 노쇠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의 배움은 효제충신을 근본으로 하여 정자(程子)의 중요 요결인 주자 학문에 가장 깊은 공부를 하였다. 우복 정경세와는 아주 절친한 벗의 관계였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한 단계 높았다. 어버이가 계실 때에는 편안한 얼굴로 모시는 예를 다하였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살았을 때와 같이 섬기셨다. 70을 넘어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성묘하는 예를 그만두지 않으셨고, 동생 창석 이준과의 우애는 강굉이라는 사람이 동생과 한 이불을 덮고 자며 우애를 드러낸 것보다 더 유명하였다. 임진왜란의 병란 중 위급한 처지에서 신명을 감동시킨 일을 창석공이 화공을 시켜 그림으로 그려 당시의 시인묵객들이 그 사실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창석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님의 가슴 속에 채워져 있는 것은 모두가 지성과 측은지심 뿐이다.”라 하였다. 공은 우복 선생과는 막역한 사이이었는데 우복 선생의 말에 “이 모씨의 후덕(厚德)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라 하였다. 우복 선생이 선발되어 서울로 들어갈 때에 돌아오는 길에 처신하는 말을 써 주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다. 또 천 마디의 말을 글로 써서 보내니 어진 이를 진출시키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으로 관건을 삼았고, 말을 권하여 채용되지 않거든 관직을 버리고 가는 것이라고 하니 그 말에 참 맛이 숨어있었다.

 아! 이것이 옛 사람의 참다운 사귐의 도리이다. 나이나 벼슬로 고관의 직위를 얻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지만 공께서는 홀로 자손들에게 상청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였다. 임종할 즈음에도 글을 외우는데 틀리지 않으니 처음을 찾아서 근원에 돌아감[原始反終]에 통달함이 있어서 조금도 겁내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손을 훈계하는 글의 경우도 앞 시대 사람들이 표현하지 않은 뜻을 드러내었으니 장수와 복을 누리고 건강한 것과 유호덕攸好德[오복(五福)의 하나.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을 이른다], 고종명한 사람에게 공이 무엇을 양보하겠는가?

 부인은 광주안씨이며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친근한 행실이 있어 흰머리가 되도록 공과 함께 지내면서 부모를 섬김에는 효행과 예절이 있었고 자손을 가르치는 데는 자애롭고 법도가 있어 반드시 공이 하는 대로 따랐다. 공보다 1년 먼저 돌아가시니 정해년 6월 며칠에 공의 장사에 따라 같은 장소에 다른 무덤으로 모셨다가 후에 풍수가의 말에 따라 중모현의 동편 추동산의 곤향 언덕에 함께 모시니 병신년 정월 며칠이었다. 아들과 손자, 증손 등 남녀 모두 합하여 60여 명이나 된다. 최산남(崔山南)의 자손이 많다고는 하지만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묘갈명에

훌륭한 교훈으로 후진들을 가르침은 위무공과 같고

천명을 즐기고 운명을 따르는 것은 진태구와 비슷하다

자손들이 왕성함이 마땅하도다.

큰집 아들 작은 집 아들이 부모의 아름다움 이어 받아 계속되리라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저작권자 © 영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