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상주인물, 흥양이씨, 월간 이전, 창석 이준, 상주시 화동면, 이우원

 흥양이씨는 상주를 대표하는 양반 집안이다. 청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이 유명해 지면서 그 집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두 분은 지금의 청리 가천[닭내]에 살았다. 월간 이전의 ‘체화당’과 ‘창석사당’이 지금도 그곳에 있다. 후손들은 아직도 이 일대에 있지만 여러 지역으로 터전을 옮겼다. 현재 상주시 화동면에 흥양이씨 중 이채하 옹이 있다. 이 어른은 월간 이전 후손인데 오래 전부터 인연이 닿았다. 이 분의 선대 조상을 몇 분 소개해 본다.

상주시 청리면 가천3길 창석사당은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8-2호로 지정되었다
상주시 청리면 가천3길 창석사당은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8-2호로 지정되었다

 이우원의 본관은 흥양이다. 호는 우원이고 자는 상천이며 처음 이름은 원이다. 아버지는 이증춘인데 안동권씨 대사간 휘도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었다. 숙종 무인년 12월에 청리의 유천리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외모가 깨끗하며 아름다웠다.

 무자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 11세였으나 슬픔이 제도를 넘어 상복을 벗지 않으셨고, 계모 금씨가 들어왔을 때 섬기기를 낳은 어머니와 같이 하여, 조모 송씨가 “옛날 왕생이란 사람이 계모 주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고 하더니, 지금 이 아이는 우리 집의 왕상이다.”고 할 정도였다. 또 황익재는 호남으로 고을살이를 나갈 때에 부채를 보내주며 어릴 때 이름이 팽맹이어서 부채면에 ‘이효자 팽맹선’이라 썼다고 한다. 그후 감찰 황준과 전적 황침 두 분도 특별나게 칭찬하면서 “이 모는 하늘이 낳은 군자다.”라 하였을 정도 인품을 가진 분이다.

 신축년 10월에 부친께서 역병을 심하게 앓아 위독해지니, 밤낮으로 목욕을 하고 들어가서는 두상 앞에서 기원하고 밖에 나가서는 칠성등 밑에서 기도를 드리며, 죽을 드려서 마시면 본인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당신도 먹지 않는 정성으로 간호하여 90여 일 만에 바로 쾌차하게 되었을 때, 모두가 효행의 감동으로 병이 나았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부친께서 청대 권상일 선생께 나아가 공부하라고 권유하였을 때, “이런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역병을 앓은 뒤로는 기거와 출입을 할 때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때가 많으니 어찌 독자로서 멀리 떠날 수 있겠습니까? 여력이 있을 때 글을 배우라는 성인의 가르침이 있으니 자식의 직분을 다하면 학문은 여기에 있습니다.”라 하자, 종고모께서 서찰을 보내 “이석이 책을 짓는데 나에게 너를 불러달라고 요청을 하니 빨리 와서 공부를 하라”고 하였다. 부친께서 권유하고 여러 숙부와 백종형께서도 권유하므로 나아갔으나, 몇 수의 책문을 쓰고 십 일 만에 돌아왔다. 이때 영남관찰사 전오겸 공이 그때 지은 책문을 보고 한참동안을 생각하더니 “진실로 경제를 아는 선비다.”라 하였다고 한다.

 옥성서원에서 무신년에 의병을 일으킬 때에 서기의 일을 맡았고, 경술년3월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이 예에 넘쳤으며, 장사 치를 때에는 금기 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죽으로 연명을 하니, 족숙 진사공 이증엽이 얼굴이 너무 수척한 것을 보고 옛일을 비유하여 타이르니, 울면서 “상중에 고기를 먹는 것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차마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라 하였다. 때마침 노복 한 사람이 미역을 사가지고 들어오자, “네가 머리채를 왜 샀는냐?”고 하니, 진사공이 즉시 닭을 삶아서 “네가 미역을 머리채로 아는 것은 위가 허약해서 정기가 손상된 까닭이다.” 라 해도 닭을 먹지 않자. 그릇을 잡고 억지로 권하였는데 땅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고 받아 마신 적이 있을 정도로 예를 지킨 분이었다.

 임자년에 3년 상을 마친 후 과거에는 뜻을 버리고, 주서 수 십 편을 뽑아내어 손수 정서를 하여, 한권의 책자를 만들어 밤낮으로 읽고 시경과 서경을 외웠다. 갑인년 봄에 황간의 금계에 우거하니 이맹산 사덕과 형덕 성원 지원등 제공들 모두가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병진년의 소회 때에는 호남의 우거로부터 참석하여 일기와 간찰 쓰는 임무를 맡으셨다.

 일찍이 문중 모임이 있을 때에 문중일로 다툼이 있으면 구석 쪽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셨고, 향중에서는 남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일을 이야기하시었다. 집에서 글만 읽고 친구들과 교유를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으시어 교유하는 사람은 적었으나 한번 알게 된 사람은 오래도록 경복해서 잊지 않으셨다고 한다. 임오년 봄에 아들 이요신이 도남향회에 참석하였을 때, 장령 권상용 공은 “나는 자네 어르신의 상밀한 예설에 깊이 감복했다”고 하였고, 산곡 황침 공은 “언론풍채가 일세를 압도 했다.” 라 하였으며, 추담 고유 공은 “무신창의와 병진년 소청에 모두 서기의 임무를 맡았는데 필한이 흐르듯 하여 책상에는 정체된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을해년 겨울에 집안의 유행병으로 재사에 나가서 요양 중 흉격통을 얻어 몇 달 고생하다가 병자년 2월 22일에 재사에서 고종하니 향년이 59세였다. 윤9월 22일에 서왕산 북쪽 기슭아래 해좌원에 장사지냈다.

김정찬 역사인물연구소장
김정찬 역사인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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