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해서 무고를 받던 올곧은 서대 김충

김 정 찬

 1500년에 상주에 살았던 사람 중, 현재의 외남에는, ‘상산사노’라 불리던 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서대 김충이다. 이 분들은 서로 교유하면서 많은 스토리를 남겼는데 군데군데 사적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김충은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마을 서쪽에 집을 하나 지어서 집 이름을 ‘서대’라 하였다. 둘째 사위가 임진왜란 때 상주최초의 의병장인 석천 김각이다. 명문가 집안답다. 우복 정경세 또한 청리. 외남을 기반으로 하는 상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쓴 서대 김충의 행장을 소개한다.

효곡서원
효곡서원
효곡서원 현판
효곡서원 현판

 

 

 

 

 

 

 공의 이름은 충(沖)이고 자는 화길(和吉)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상산인(商山人)으로, 고려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비궁(匪躬)의 후손이다. 찬성사의 후손 중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정신(鼎臣),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낸 겸(謙),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낸 상직(尙直), 내원서 영(內苑署令)을 지낸 신지(愼知)란 분이 있었으니 대대로 관직을 지낸 집안의 자손이다.

 내원서 영은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극효(克孝)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조고는 삼산(三山)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선고는 옹(顒)으로 자호(自號)가 외재(畏齋)인데, 중묘(中廟) 기묘년(1519, 종종14)에 ‘옛것을 흠모하면서 뜻을 고상히 하고, 학문이 순정하고 바르다.〔慕古尙志 學問醇正〕’는 것으로 공천(公薦)되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비(妣)는 의인정씨(宜人鄭氏)로 사인(士人) 정구(鄭俅)의 따님인데, 정덕 계유년(1513, 중종8)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는 집안에서 공부하였는데, 문예(文藝)로써 스스로 닦았다. 신해년(1551, 명종6)에 명묘(明廟)가 선성(先聖)을 제사 지내면서 선비들을 뽑을 때에 공을 일등으로 발탁하고 곧바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하였다. 얼마 뒤에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에 제수되었다가 형조좌랑(刑曹佐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겨졌다. 계축년(1553)에 해서(海西)의 막부(幕府)에서 보좌하였으며,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다. 갑인년(1554)에 임기가 만료되어 호서(湖西)로 옮겨져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파직되었다. 병진년(1556)에 함흥부 통판(咸興府通判)에 제수되었다. 정사년(1557)에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옮겨졌으며, 호조 정랑,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을 역임하였다.

 신유년(1561, 명종16)에 외직(外職)으로 나가 평택 현감(平澤縣監)이 되었다. 을축년(1565)에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정묘년(1567)에 다시 호조정랑에 제수되었다가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겨졌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초계군수(草溪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기사년(1569)에 파직되었다. 신미년(1571)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옮겨졌다가 선공감정(繕工監正)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572) 4월에 큰아들이 죽어 곡하느라 몸이 심하게 상해 11월에 병으로 서울에 있는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60세였다. 다음 해 3월에 장천(長川)에 있는 추동(楸洞)의 신좌을향(辛坐乙向) 언덕으로 상구(喪柩)를 싣고 와 장사 지냈으니, 바로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었다.

 공은 청렴하고 개결하고 간솔하고 고졸(古拙)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냉랭하였고 평상시 거처함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서로 오가며 붙좇지 않았다. 조정에 서서는 더욱 더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거나 간청하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았으며, 청탁이 들어오면 일찍이 뜻을 굽혀서 따라 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맡는 자리마다 문득 어그러지거나 혹 죄에 얽혀들었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을 마치 짐독(鴆毒)처럼 보았는데, 호서(湖西)의 막부(幕府)에 있을 때에는 술에 취하여 술주정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들 코웃음을 치면서 탄식하였으며, 공 역시 끝내 시세(時勢)에 따라 부앙(俯仰)하고자 하는 뜻이 없었다.

 공이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언덕 하나가 있었는데,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수목이 울창한 것이 아주 좋았다. 이에 평택(平澤)에서 돌아온 뒤에는 그곳에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지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 앉을 만하였다. 서대초당(西臺草堂)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고는 날마다 그 속에서 시를 읊조리며 지냈는데, 기쁘게 자신의 뜻을 얻은 것처럼 즐기면서 끼니가 자주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높은 관작(官爵)이 흠모할 만한 것임도 잊은 채 지냈다.

 공은 평소에 시를 지어 읊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짤막한 절구(絶句)를 잘 지었는바, 쓸쓸한 가운데에도 남은 맛이 있어 자못 사람들이 전해 외웠다. 그러나 모두 산실된 탓에 지금은 겨우 한 권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또 일찍이 들은 바를 직접 기록한 책 하나가 있어 이름을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라고 하였는데, 이 책 역시 병란에 잃어버렸다.

 숙인(淑人) 풍덕 장씨(豐德張氏)는 현감을 지낸 장세강(張世綱)의 따님이며,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른 장맹경(張孟卿)의 후손이다. 공보다 17년 뒤에 죽어 공의 묘에 합부(合祔)되었으며, 향년은 73세였다.

 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지대(之岱)와 지연(之衍)이고, 딸 넷을 두었는데 사인(士人) 권이중(權以中), 현감 김각(金覺), 생원 변경장(邊慶長), 진사 신봉서(辛鳳瑞)가 사위이다. 지대는 선무랑(宣務郞) 반사렴(潘士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계(繼)이며 생원이다. 지연은 충의위(忠義衛) 안황(安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진(縝)과 강(絳)이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최집(崔㠍)에게 시집갔다. 외손(外孫)은 남자와 여자를 합해 모두 여덟 명이다. 증손은 이름이 철(喆)이고, 또 남자 셋과 여자 둘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공의 둘째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나와 함께 종유(從遊)하면서 일찍이 공의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승낙을 하고서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질(子姪)들이 다시 와서 청하기에 드디어 대략 관직(官職)과 족계(族系)와 행실(行實)과 치적(治績)을 서술하여 칼을 거는 마음을 붙이고 이어 명을 지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남이 뱉는 가래침을 받아먹으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공손하다고 한다네

남을 위해 초를 빌려 오는 걸 보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충직하다고 한다네

공은 능히 그와 같이 못하였으니

거꾸러져 궁해질 수밖에 없었지

사람들은 공을 보고 궁했다고 하지만

공은 이에 통달했다고 생각했다네

서대의 물 맑고 넘실넘실 거리니

꼭 공의 모습 닮았다네

추동의 묘 그윽하고 깊숙하나니

공이 묻혀 잠든 곳이라네

김정찬 역사인물연구소장
김정찬 역사인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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