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 순 덕

 가을날 하루가 저물어 간다. 마지막일지 모를 더위에 해도 힘들었는지 더욱 붉게 기울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려도 이젠 달달한 칡꽃향이나 포도 익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을풍경
가을풍경
가을저녁 노을
가을저녁 노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가을 내음인 들깨향이 감나무 밑에서 노오란 웃음으로 유혹 한다. 깻잎김치를 담굴 노란 깻잎을 딸 때가 되었다. 하늘엔 새파랗게 높고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무슨 그림인양 제각각의 모양을 자랑한다, 그 파란 하늘을 향해 코스모스는 하늘하늘 손짓을 한다. 함께 놀자고... 고추잠자리와 메뚜기도 그 하늘 구름에 올라 보려는지 쉼 없이 날개짓을 하거나 폴짝이고 이미 그림자마저 희미한 여름을 아쉬워하는 봉숭아는 심통스레 씨앗주머니를 불룩이 채웠다. 여기저기 온통 가을이 지천이다.

 이 맘 때면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서는 뙤양볕 아래 가을운동회 연습이 한창 이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이마에 하얗고 파란 머리띠를 두르고, 양 옆으로 하얀 줄이 그러진 체육복이나 아랫단에 고무줄이 넣어진 반바지를 입은 전교생이 운동회 날이 가까워지면 오후시간은 거의 운동회연습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추억의 운동회
추억의 운동회

 이 때는 난 청군. 넌? 하면서 가깝던 친구도 편을 갈라 놀았다. 달리기, 장애물달리기, 행운의 편지 줍기 등의 개인 경기와 박 터트리기, 줄다리기, 부락 또는 청백대항 계주 등 단체경기 외에도 먼 길 바리바리 음식을 싸들고 참석하신 부모님들의 볼거리를 위한 남학생들의 곤봉체조나 리듬체조, 차전놀이 그리고 여학생들의 부채춤, 소고춤, 놋다리밟기재현 등은 여름방학이 끝나고부터 매일매일 조금씩 연습을 했다. 당일이 가까워지면 한복에 족두리 깃털이 달린 부채, 남자아이들은 곤봉에 반짝이를 달거나 알록달록 색을 칠해 자신의 것임을 표시하거나 꾸몄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응원 도구 반짝이 총채나 끈을 찢어서 만든 총채, 색색의 종이꽃 등. 저학년들은 특히나 이 종이꽃을 머리에 달거나 손가락에 끼고 하는 율동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두 종이를 사서 자르고 접고 펴고 그렇게 직접 만들어서 준비물을 챙겼었다. 어디 운동회 준비물만 그랬을까? 예전엔 놀잇감들도 다 자연물에서 얻거나 생활용품들을 활용해 직접 만들어 놀았는데..... 깡통에 돌 몇 개 넣어 찌그러트리면 온 동네 아이들이 종일 깡통차기를 하며 놀 수 있었고, 그 깡통에 나무토막과 불씨를 넣고 돌리면 그게 쥐불놀이였다. 찰고무줄 두 줄만 있으면 한반 여학생들이 모두 함께 즐거웠다. 

 그 뿐이랴 예쁜 돌 몇 개만 있으면 비석치기에 땅따먹기, 공기놀이까지, 겨울이면 구부러진 막대에 얼음조각 하나면 얼음판에서 아이스하키를 했고, 비료포대 하나면 야구글러브도 되고 산태에 눈썰매도 탔다. 가끔씩은 아이스크림이나 엿으로도 바꿔 먹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비료포대가 귀했다는 점 일 뿐. 그렇게 그 때는 모든 놀잇감을 스스로 만들거나 자연에서 얻어 놀았었는데, 요즘은 다 마트나 백화점에 있는 것만이 놀잇감이고, 위생. 환경호르몬. 창의력개발 등등 따져가며 비싼 값 치러 사 줘야 좋은 부모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니......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드디어 운동회 날. 파란 하늘에 만국기가 펄럭인다. 예나 지금이나 100M 달리기 출발점에 서면 왜 그리도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선생님의 출발 총소리는 천둥소리보다 무서웠었다. 그러다보니 항상 출발이 친구들에 비해 뒤쳐질 밖에.... 나중에 육상부 친구를 통해 안 사실인데 그 친구들은 사실 출발총소리를 듣기 전에 이미 출발준비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준비!”를 외치거나 손을 들면 습관적으로 일정한 시각이 지난 후 총을 쏘게 되고, 친구는 그 시간을 세고 있다가 자동 출발. 거의 오차가 없다고 했다. 그래 육상부니까. 특히나 100M 달리기의 경우 0.1초로도 승패를 가르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건 그렇게 결승선에 다다르면 1,2,3등의 깃발 뒤로 손등이나 손목에 찍힌 자신의 등수에 맞춰 줄을 섰다. 1등은 공책 3권, 2등은 2권, 3등은 1권. 달리기를 잘 하는 친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짐이 더 많아진다. 전혀 무겁지 않은 짐이. 나도 작은오빠나 육상부 친구들이 신었던 육상화를 신었다면 어쩌면 1등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운동화에 빨강, 파랑, 노랑의 줄무늬에 발바닥 골이 깊은 찰고무로 되어있어 운동장을 달리면 흙이 발 뒤로 팍팍 튕겨져 무지 빨라 보였다. 심지어 경기 때는 발바닥에 못까지 박혀있는 운동화를 신기도 했다. 그렇게 우서운 성적의 오전 달리기가 끝나면 운동장 외곽으로 군데군데 마을끼리 모여 점심 잔치가 벌어진다. 삶은 햇고구마에 햇밤, 삶은 계란에 삭힌 감까지, 본부석에서는 육성회와 어머니회에서 끓인 육개장이 군침을 쏟아내게 하였다. 이 날은 아이들만의 운동회가 아닌 면 전체 잔칫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추억의 운동회
추억의 운동회

 또 운동장 곳곳에 평소 보지 못하던 장사꾼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데 바람을 넣어 뛰는 시늉을 하는 말이나, 입으로 불면 혓바닥을 내밀 듯 돌돌 말렸다가 길게 풀려나는 장난감, 부메랑이나 딱지, 비닐에 든 20원짜리 쥬스, 소고모양의 북에 끈이 달린 구슬이 있어 손박닥 사이에 두고 비비면 소리를 내는 북, 솜사탕, 물고기나 큰 칼모양의 달고나 뽑기 등을 눈요기라도 실컷 할 수 있는 날 이었다. 많이 먹고, 많이 조르고, 많이 혼나던 점심시간이 지나면 선생님이나 귀빈, 부모님이 함께하는 박 터트리기나 행운의 편지 줍기가 이어지게 되는데 박을 터트리는 콩주머니도 물론 직접 만든 것 이었다. 행운의 편지 줍기는 그야말로 운이 잘 따라야 했다. 그 말은 육상부가 꼴찌를 할 수도 있고, 내가 1등을 할 수도 있는 달리기였다. 우체국장님이나 노인회장님, 면장님이나 육성회장처럼 우리가 평소 알지 못하는 분과 함께 손을 잡고 달려 오시오라는 편지를 줍는 친구는 대상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야 했으며, 운동회 소품이나 선생님 부모님 손을 잡고 달리는 친구들은 좀 쉬운 편이었다.

추억의 운동회 스크렙
추억의 운동회 스크렙

 가끔씩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며 달리는 벌칙을 주운 친구도 있었고, 가장 행운아는 그냥 달려가기도 했었다. 난 교장선생님 손잡고 달리기. 본부석을 향해 “교장선생님”을 외쳤다. 잽싸게 달려 나와 나를 끌다싶이 달리신 선생님 덕분에 겨우 공책을 한권 챙겼었다. 정말 운이 없는 친구는 대상을 찾아 운동장을 두 바퀴나 돌기도 했었다. 슬슬 운동회 마지막이 되면 마을별 또는 청백대항 400M 계주가 벌어지는데 학년별 대표가 남녀 각각 한명씩 바턴을 넘기며 달리는 경기인데 이 점수가 가장 높게 배점이 되어있기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선두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 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더 큰 소리 응원을 했다. 3.3.7.박수.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그리고 개선문을 통과해 마지막 다시 아침의 대형으로 줄을 지어서서는 성적발표가 있고, 연습한데로 이긴 팀은 만세 삼창을, 진 팀은 내키지 않는 박수를 세게 쳐 주어야 했다.

 목이 터지라 부르던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다시 한 번 동네언니에게 물려받은 체육복 입고, 밤새 접은 꽃종이 흔들며 그 운동장에 서 보고 싶다. “상”이라고 도장 찍힌 공책도 받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응원가를 불러야 할지? 그리고 누가 내 손등에 어떤 도장을 찍어 줄지..... 무엇보다 100M를 전력질주 할 자신도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저 높고 푸른 하늘에 코스모스 꽃잎 날려 보내며 그 날을 그리워 할 뿐....

 요즘 아이들의 운동회는 어떠려나? 몇 해 더 기다려 손주의 운동회나 가 보아야 겠다.

추억의 운동회 스크렙
추억의 운동회 스크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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