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찔찔이

고 순 덕

고순덕
고순덕

 눈물 쏙 빠지게 온몸을 괴롭히던 몸살이 물러가고, 이번엔 누우런 코가 콧구멍과 목구멍을 막고 있다. 답답하고 숨쉬기도 불편하다. 휴지를 옆에 끼고 종일 “끄흥 흥 흥.....” 시원지가 않다. 코 밑이 다 헐어 버렸는데도 코는 멈추지 않는다. 두 살 터울의 남편이 가끔씩 나를 어리다 놀리며 하던 말 “내가 교복입고 중학교 다닐 때 넌 코 찔찔 흘리고 다니던게 감히......” 고작 1년 7개월 먼저 태어났으면서 얼마나 유세인지...... 하지만 지금은 진짜 코 찔찔이가 되어 버렸다.

 그 옛날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왜 그리 코를 많이 흘렀던 걸까? 오죽하면 국민학교 입학 때 손수건을 달고 다니지 않았던가. 입학식 날 학교에 갔더니 빨강, 노랑, 파랑 깃발로 1, 2, 3반을 표시하고, 내 가슴에도 손수건과 함께 1반인 빨간색 리본을 달았다. 그리고 이름표까지. 옷핀이 휘청할 정도다. 어느 날인가는 엄마가 빨래를 하느라 손수건을 떼어놓고 다시 달지 못해 아침에 그대로 등교하다가 아차하는 생각이 들자 울며 다시 집으로 돌아와 손수건을 챙겨 달았지만 이번엔 다시 지각을 할까 걱정스러워 학교가 보일 때까지 울며불며 갔던 날도 있었다.

 
 

 한 달쯤 그렇게 두툼한 훈장같은 손수건을 달고 다녔으려나? 손수건을 뗀 다음부터는 흘러나온 코를 손등이나 옷소매로 처리를 했다. 많은 아이들의 옷소매가 번들번들 또는 꾸덕꾸덕 콧물에 범벅이 되어 소매 끝부터 헤어지기 일쑤다. 그 다음 단계는 코가 흘러나오기 전에 훌쩍하고 들이마시는 내공. 그리고 때로는 혀를 인중으로 낼름거리며 빨아 먹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코 맛.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런 기억들이 있다. 나만 이런 지저분한 기억이 있는 걸까? 아닐거야.

 어릴 적 친구들을 표현할 때 ‘코 찔찔이 시절 친구’란 말을 적잖이 쓰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코를 흘리는 아이도 드물뿐더러 어쩌다 감기가 걸려도 맑은 콧물만 조금, 그나마도 흘러내리기가 바쁘게 부드러운 티슈로 누군가 냉큼 닦아주고 없다. 그 때는 휴지는커녕 신문지라도 싹싹 비며 코를 풀면 기름 냄새가 솔솔, 어떤 때는 코에 잉크 자욱이 묻어나기도 했다.

 
 
 
 

 

 

 

 

 

 

큰 딸아이가 어렸을 적에 감기가 걸려 코가 막히면 “산애야 흥! 흥해야지!”하면 딸은 코에 바람을 내어 코를 푸는 것이 아니라 말로 “흥. 흥”이라고 따라 소리를 내었다. “아니 산애야 흥! 하라고 흥” 하면 이번에도 말로 소리내어 “흥. 흥.” 속이 터진다. 딸애에게 시범을 보이느라 들지도 않은 내 코만 혹사를 한다. 그러다 갑자기 제체기를 하는 딸. 턱까지 쑥 빠진 두 줄기 진액이 덜렁덜렁. 웃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습을 노치지 않겠다고 카메라를 찾다보면 어느새 손등으로 뺨까지 쓰윽 진액을 끌어다 바르는 아이. 으이그...

 영구나 맹구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의 모습을 표현할 때 코가 인중이나 뺨까지 늘러 붙게 분장을 하는데 그건 또 왜 그런걸까? 내 어릴 적 친구 중에도 유난히 코를 많이 흘리던 앞집 쑥개라는 한 살 어린 친구가 살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물론 바보는 아니었다. 눈 오는 겨울날에는 네모나게 생긴 아버지의 삽을 들고 나와 나를 태우고 온 동네를 누비기도 했었는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몇 집 더 건너로 이사를 가더니, 얼마지 않아 먼 곳으로 영영 이사를 가 버렸다.

 그 후로 보지 못 한 쑥개, 비료포대를 들고 산태를 함께 타던 꼬마, 상재, 수미, 금동이, 말숙이, 정아 모두가 함께 코 흘리며 골목과 들판을 누비던 그리운 친구고 동생들이다. “꼬마야 노올자!” “수미야 노올자!” “우리 집에 갈사람 요요 붙어라. 우리 집에 갈사람 요요 붙어라!”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도 잡아주는 친구가 없다. 아무도 대답해 주는 이 하나 없다.

 코 찔찔이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가끔씩 내가 그 들을 보고파하듯 그들도 나를 그리워할까? 연신 코를 훌쩍이며 그들은 나처럼 코 훌쩍일 일 없기를 기도해 본다.

저작권자 © 영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