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사랑을 싣고....

고 순 덕

고순덕
고순덕

 201번. 우리 집 전화번호다. 언제까지 이 번호를 썼는지는 기억이 정확지가 않다. 중학교 때도 이 번호였던 것도 같고, 작은언니 친구가 우체국에서 교환으로 근무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다. 왼손으로 시커먼 전화기 머리를 부여잡고 오른손으로 옆에 있는 손잡이를 드르륵드륵 몇 바퀴 돌리면 상냥한 교환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환입니다.” “여보세요? 209번요.” 하면 신호음이 나고 잠시 후 전화연결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다이얼식 전화기가 나오고, 52-3901로 전화번호가 바뀌었다.

 손가락을 숫자마다 뚫린 구멍에 넣어 스윽 돌려 당겼다 놓으면 ‘다라락’ 소리를 내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다이얼식 전화기는 교환도 필요 없었다. 모양도 비슷한 듯 더 예쁘고 색깔도 다양하게 나왔다. 다이얼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소리는 지금 상상해도 경쾌하고 재미났다. 교환언니의 도움이나 도청(?)없이 통화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 그 때는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다 외웠는데.... 아니 솔직히 외워야 할 전화번호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친구가 적어서는 아니고 그 때만해도 집집마다 전화를 두고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그나마 일찍 전화기를 들여놓은 편인데 그 전에 마을에 한 두 대의 전화기가 있었다. 주로 이장 댁에 전화기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오면 방송을 하거나 이장님의 가족이 직접 뛰어 전화 받을 집으로 가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통화 음질도 좋지 않아 수화기를 부여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그리고 또 한 차례 전화번호가 바뀌었는데 이번엔 552-3901 버튼식 전화기가 나오면서 새로운 전화번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는 번호. 부모님이 돌아가신 빈 집에 큰오빠는 한동안 전화를 없애지 않고 유지해 두었었다.

 
 
 
 

 

 

 

 

 

 

 

 가끔씩 이기는 했지만 집에 왔을 때 전화를 써야하고, 또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때문인 것도 같다. 부모님. 또래 친구들보다 연세가 많으셨고, 더 완고하셨던 아버지는 남자사람친구들에게서 전화 오는 것도 싫어하고 잘 바꾸어주려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언니야 이숙이언니 전화.”하는거다. ‘이숙이? 이숙이가 누구지?’ 동생이 아버지 몰래 눈을 껌뻑거린다. ‘아~~!’ 남편 아니 당시 선배의 전화를 받은 동생이 아버지 몰래 나에게 바꿔주기 위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남편이름의 앞 글자에 ‘숙’을 붙여 여자 친구 전화 인 것처럼 슬쩍...... 동생 덕분에 정분이 나 남편이 된 선배와의 전화얘기는 이것이 끝은 아니다. 내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을 때는 우리 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선배가 직접 전화를 받지 않으면 누가 전화를 받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남이선배의 같은 과 후배 고순덕입니다.

 
 

 선배에게 학보사일로 물어볼 게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집에 있으면 통화할 수 있을까요?” 당당하게 나를 밝히고 용건을 말했다. 어느 날은 선배의 아버님께서 나의 전화를 받으시더니 껄껄껄 웃으시며 전화를 바꿔주셨는데, 술이 취하신듯 한 음색이기에 건강을 위해 절주하시란 당부의 말씀까지 드렸다. 그 날 저녁 어머님께 “거 참 맹랑하데......” 하셨고, 선배 군입대 전 날은 아버님과 소주대병을 마주하고 “그 놈 쓸만하더라.” 하셨단다. 그래서 선배는 나의 남편이 되어 볼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입대 후 남편은 바둑과 분재를 잘 하는 관계로 연대장의 보조일(따까리)을 했는데 그 자리는 사제 전화를 쓸 수 있었고, 우리는 거의 매일 통화를 했다.

 
 

 점심시간엔 남편이 나의 회사로, 퇴근시간 버스정류장 공중전화박스에서는 내가 남편의 부대로 전화를 했는데 군부대 교환원이 목소리만 듣고도 나인 줄 알 정도였다. 그렇게 달콤 설레는 전화데이트를 얼마나 했을까? 군전화로서는 나올 수 없는 전화요금이 계속되자 연대장이 자주 쓰는 전화번호를 추적했고, 남편은 영창감 이었으나 연대장의 선처로 완전군장 종일 연병장을 돌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사랑이 되고 부부를 거쳐 웬수가 되었다.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 볼만큼 힘들 때 ‘넘편’이라 저장된 전화번호를 누른다. 한동안은 아들이 전화를 받았지만, 지금은 없는 번호라는 자동응답이 뜬다. 그래도 난 그 번호를 지울 수 없다. 앞으로도 지울 일은 없을 거다. 언제고 하늘을 잇는 전화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상 속에 있던 휴대전화나 영상통화도 현실화 되었는데, 하늘을 잇는 전화라고 개발되지 못할까?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오랫동안 안부 전하지 못한 감사한 분들께 사랑담은 전화부터 넣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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