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매

고 순 덕

 한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채벌에 관해 가다 부다 말들이 많아서, 요즘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인 듯하다. 그러나 내가 자랄 때엔 맞으면서 큰다는 말이 있을 만큼 선생님의 채벌에 관해서 감히 토를 달수가 없었다.

 
 

 숙제를 않거나, 준비물을 빠트려서, 공부시간에 떠들거나, 친구와 싸워서, 또는 시험 점수가 낮아서 우리는 벌을 받거나 매를 맞았다. 선생님에 따라 벌의 형태도 매의 파워도 각기 달랐는데 교실 뒤나 복도에서 꾸러 앉아 손들기를 기본으로 의자들고 손들기, 눈감기, 업드려 뻗쳐, 머리박고 업드려 뻗쳐, 업드려 뻗쳐 한발들기, 토끼걸음이나 기마자세, 몰래 까먹던 도시락 반찬 물고 있기 등 힘든 자세로 벌을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갖가지 도구로 또 상상을 초월한 형태의 채벌을 했다. 기억에 남는 것들을 나열해 보려 한다. 먼저 밝혀 두고자 하는 것은 당시의 선생님을 비난한다거나 미워함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듯 추억의 한 페이지를 열고자 함이니 다른 생각은 없었으면 한다.

 중학교 때 생물선생님은 수업 중에 자주 학생을 불려 일으켜 수업내용에 대한 반문을 하셨는데 틀린 대답을 하면, 플라스틱 자를 얼굴 가까이에 대고 바깥으로 젖혔다가 탄력으로 찰싹. 본인은 장난스레 웃으셨지만 그 따가움과 소리는 맞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이미 경험해 본 친구들은 선생님의 자가 가까이 오면 먼저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아참 손바닥을 맞을 때도 유난히 엄살이 심해 회초리가 내려올라치면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손을 빼고 뒷걸음질 하는 친구를 보고 웃은 일도 많았다. 그러다 오히려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마디에 맞아 손이 부어오르거나 더 고통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이 사건화 되거나 항의하는 부모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건 맞은 우리들도 마찬가지. 어떤 선생님은 치마를 입는 여학생의 종아리를 흉하게 할 수 없다며 책상위에 꾸러 앉히고는 허벅지나 발바닥을 때리는 선생님도 계셨다. 허벅지는 정말이지 아팠을 거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때리지나 말던지..... 딱딱한 출석부로 머리 때리기나 자는 아이에게 분필을 던져 머리를 맞히는 일은 오히려 애교스럽다. 같은 출석부도 모서리나 꼭지로 맞으면 그 강도가 또 다르다.

 여고시절 국어선생님은 당구 큐대 같은 지시봉을 들고 다니셨고, 채벌을 할 때도 칠판의 돌출된 부위를 잡고 서게 하거나 엎드리게 한 뒤 엉덩이에 한큐를 날렸다. 그러면 시커먼 피멍울이 맺혀 족히 이삼주는 지나야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그러나 통증보다 더 아픈건 모멸감 이었다. 그 선생님의 또 다른 채벌은 겨드랑쪽 팔을 꼬집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대단한 불쾌감과 통증, 멍이 동반되었다. 이런 선생님의 채벌이 무엇보다 싫었기에 선생님께 찍히지 않으려 애를 썼고, 그것이 선생님의 의도였으리라 이제와 좋게 생각해 본다. 고1 맘 여린 수학선생님은 어느 날 시험결과 100점서부터 모자란 1점에 한 대씩 때리겠다고 엄포를 놓으셨고, 드디어 반평균 30~40점도 안되는 우리들에게 약속대로 매를 들기 시작하셨는데, 반평균이 저렇다보니 한사람당 60~70대씩. 선생님은 차마 세차게 몽둥이를 휘두르지 못하고, 우리들의 엉덩이를 달래듯 톡톡 치셨다.

 
 

 그러다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종례를 하기 위한 담임선생님께의 등장,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벌을 보고야 말았다. 맘 여린 수학선생님과 다르게 화끈 터프한 담임선생님은 그러잖아도 학년에서 꼴등을 한 우리가 못마땅 했는데, 이를 보다 못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대신 매를 들려고 한 일도 있었다. 우리는 다들 죽었구나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수학선생님 왈 “나머지 학생들은 다음시간에 다시 보도록 하고, 틀린 문제는 다섯 번씩 다시 풀어오도록. 알겠나?” 하고는 회장의 구령에 맞춰 인사를 받고 교실을 떠나셨다.

 채벌을 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셨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을 해 보긴 했지만, 잔소리를 늘어놓을 뿐 채벌을 가한 일은 없었다.

 다만 나의 아이들에게 매를 들 때는 나의 못난 성질 때문도 있지만, 내 아이가 더 잘 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생인 난 채벌을 많이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매번 아프고, 싫고, 굴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그러니 지금 내 옆에 누군가 그 때의 선생님처럼 지각하면 다시는 지각하지 않게 화장실 청소를 시키고, 내 삶이 옳지 않다거나 나의 계획에서 엇나갈 때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게 하는 선생님이 계셨음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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