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약속

고 순 덕

 

 2017년 11월 24일. 첫눈이 내렸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아침에 눈을 뜨니 첫 눈답지 않게 소복이 쌓여 있었고, 출근을 하고도 한참을 더 내렸다. 그 날은 일하는 곳에 단체손님이 오기로 예약되어 있어서 출근과 함께 눈을 쓰느라 분주했다. 결국 먼 곳에서 오신 손님들은 미끌미끌 조심조심 미리 터놓은 오솔길 같은 눈 사이 좁은 길을 걸어 오셨다. 그리고 그 많던 눈이 몇 몇 추억할 수 있는 사진만 남긴 채 언제 왔냐는 듯 이내 녹아 버렸다.

 
 

 2018년 11월 24일. 첫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요란하더니,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출근을 했다. 올해도 첫 눈이 세 시간을 넘게 펑펑 쏟아졌다. 참 이상한 우연이지? 같은 날에 비슷한 양상의 첫 눈이 내리다니...... 기념관엔 관람객이 아닌 갑작스런 많은 눈을 피해 찾아든 대피객도 있었다.

 
 

첫 눈 하면 괜스레 설레는 것은 아직도 철들지 않음인지? 왠지 누구든 잡고 얘기하고 싶고, 보고 싶었다. 약속을 잡고, 따뜻한 난로를 사이에 두고, 아니면 영화라도..... 하지만 현실은 출근, 정상근무, 퇴근길에 빙판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철은 들지 않았지만 현실에 찌들긴 했나보다. 예전에도 그랬다. 첫 눈을 맞으며 학교를 오갈 때면 괜스레 신이 나서 십리길이 멀지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인가 친구들과 십년 후 첫눈이 오는 날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당시 그 약속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약속이었는지...... 그 때의 10년 후면 스물셋. 대학생이거나, 남학생이면 군복무중 일수도 있고,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머무는 지역도 다 달라 첫눈이 오는 시기도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저런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렸기에 가능한 약속이었다. 실은 지난달에도 난 지인 네명과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면서 장난삼아 단서를 붙였는데 첫눈의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눈발이 하나라도 내리는 날을 첫눈 온 날로 한다. 아니면 일기예보가 있는 날? 또 아니면 우리 다섯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라도 땅을 덮는 눈이 오는 날로 하자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정작 첫눈이 오는 날 단톡방은 조용했다. “부정할 수 없이 첫눈이 펑펑 내리는데, 우리 오늘 만나는 건가요?”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한사람은 시댁에 김장을 하러 가 열심히 일하는 중이라 하고, 한 사람은 염소 밥 주러 갔다가 미끄러져 허리를 삐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세시간이 걸렸단다. 또 다른 이는 눈오는 날 집밖은 춥고 무섭다며 아이들과 달콤한 늦잠을 잤고, 톡소리에 깨었단다. 남은 한사람은 묵묵부답. 심지어 톡을 읽지도 않는다. 실은 나도 약속이 잡힐까봐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워낙 많이 내린 첫눈이 퇴근시간까지 녹지않을 것 같아 사실 운전하기가 겁이 났다. 그렇게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약속은 스물스물 녹아 사라지는 첫눈마냥 사라지고 지켜지지 않았다.

 
 

 누군가 “첫눈 오는 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SNS에 올린 것을 보았다. 난 ‘부질없는 약속!’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몇 월, 며칠, 몇 시로 약속을 정해도 지각을 하는 이도 있고, 잊는 이도 있는데 막연히 첫눈 오는 날의 만남이라.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반쯤은 두고 하는 약속은 아닐까? 눈이 다 녹아버리고, 이성을 되찾은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다. 그래도 여전히 첫눈이던 두 번째 눈이던 눈이 오는 날은 설렌다. 세상이 순백의 겨울로 뒤덮여 고요한 밤. 뽀드득뽀드득 칼바람에 더욱 빛나는 별들이 밝혀주는 밤길을 걸어 친구 집에 가고 싶다. 소죽끓인 방 아랫목에 시린 발을 넣어 녹이며, 솜이불 위에 신문지 깔아두고 군고구마 껍질 호호 불어가며 까먹던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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