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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재령강씨의 일문사처사(一門四處士)와 대명사처사(大明四處士)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종가시리즈 14번째
변해철 편집국장  |  ynt@y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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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12  1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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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강씨의 일문사처사(一門四處士)와 대명사처사(大明四處士)

김정찬

 

   
▲ 김정찬 상주역사인물연구소장

 재령강씨는 지금의 갑장산 자락에 살았다. 공성에서 이쪽으로 옮겨 온 사람은 남계 강응철이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으며 이 일대에서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연악문회이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강응철, 이전, 이준, 정경세를 두고 상산사호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아들은 4명인데 이름은 용후(用候), 용량(用良), 용정(用正), 용직(用直)이다. 맏아들인 강용후는 호가 눌헌(訥軒)이다. 지금까지도 그의 행장이나 가장 등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용후는 대촌 마을에 살았다. 재령강씨는 지금도 대촌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당시에 학행과 효행이 출천(出天)한 다섯 분을 모시고 봉향하는 세덕사(世德祠)를 대촌에 지었다. 세덕사는 조상의 덕을 대대로 기억하고 존경하는 의미에서 영원히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을 말하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이 되거나 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세덕사도 전국적으로 보면 꽤 많은 편이다. 세덕사의 건립은 아주 옛날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앞 시대 임금의 제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현재 임금의 법령을 범하지 않으면서도 자손들에게는 선조를 위하는 도에 합치되게 하는 점이 있기도 하다.

   
▲ 재령강씨 유래

 사대부의 집안에서 3대까지만 제사를 지내다가 정자(程子)가 “고조는 복(服)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면서 4대 봉사(奉祀)를 하게 되었는데, 대(代)가 다하면 매안(埋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대부 집안 가운데 처음으로 터를 잡고 창업한 선조의 경우에 묘 아래의 재사에 장주(藏主)하는 것을 허용하여 대대로 제사를 지내어서 그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려는 마음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천리인정(天理人情) 상 그만둘 수 없는 경우에서 나온 것으로 후현(後賢)이 이러한 의미로 일으켜서 그 선조의 공덕이 멀리 자손들에게 미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 묘우를 별도로 세워서 몇 대를 거쳐서 대대로 봉향하여 제사를 지내어 공경하고 추모하려고 세덕사를 세운 것이다.

 대촌 세덕사는 남계 선생과 선생의 아들 4형제분을 함께 모시고 있는데 처음에는 남계선생만 봉향하다가 추후에 4형제분을 함께 배향하였다. 1702년에 처음으로 세우고, 1768년에 중건하였으며, 1802년에 중수하였다. 그런데 서원철폐령이후에 묘우가 훼철된 이후로 자손들은 세덕사를 중건하려는 마음을 가진지가 오래되었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눌헌공(訥軒公)의 4형제분은 모두가 문장행의(文章行誼)로 고을에서 저명하다고 하여, 명나라 황제가 망하는 날에 충의(忠義)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매진하는 규범으로 삼고,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면서 벼슬하지 않으며 편친(偏親)을 함께 봉양할 때 극진하게 효양(孝養)하면서 사리산(士里山)에다가 집을 짓고는 ‘황음헌(篁陰軒)’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서로 모여서 단란하게 지내는 곳으로 삼았고, 원중(園中)에 대나무를 심은 것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은 의미를 취한 것이다. 와목동(臥牧洞)에 초려(草廬)를 지어서 ‘와운재(臥雲齋)’라고 한 것은 시회(時會)의 공간으로 삼은 것이고, 국화를 계단 앞에 심은 것은 율리(栗里)에서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붙인 그 역사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4형제분이 일찍이 남들에게 말을 할 때 임진왜란의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명나라가 난을 구해주었다는 은혜를 칭송하며 문득 눈물을 흘리며 개탄해 하였더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선생이 그 의렬(義烈)이 있는 당에 와서 보고는 당에다가 손수 ‘사열사려(四烈士閭)’라는 네 글자를 써서 문미(門楣)에다가 걸었다. 이때부터 당세의 사대부 가운데 이곳으로 유람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사열사(四烈士)’로 칭송하였다.

 눌헌공訥軒公은 준매한 자질과 크고 깊은 도량으로 경사(經史)를 관통하였으며, 효제를 돈독하게 행하고 진실을 지키고 바탕을 실천하여 명성이 우뚝하였다. 와운공臥雲公은 장중한 모습과 진실되고 순박한 성품으로 시례(詩禮)의 업을 이어받고서 의목(義睦)의 풍모를 지녀 생도들을 창권(倡勸)하여 고을에서 모범이 되었다. 모재공茅齋公은 총명하고 영특하여 윤리도덕에 매진하여 자애롭고 성실한 마음이 마음에 가득하여 벽면과 책상위에는 좋은 귀감의 글과 격언을 써 놓고 또 아침저녁으로 관성(觀省)하여서 부사(父師)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양동공陽洞公은 성미(性味)의 순박함과 품도(風度)의 뛰어남은 진계방을 동생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던 그 고사와 거의 다름이 없고, 가르침에 힘입은 바와 향기에 젖어든 바가 또 순씨(荀氏) 집안의 여덟마리 용처럼 스스로 되었다.

 무릇 이 네 분의 조건은 참으로 선생의 아들로 불리어지기에 부끄럽지 않다. 이에 그 대절(大節)은 또 모두가 우뚝한 것이 있으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그 때에 온 나라가 홍수가 대고 구하(九夏)에 피 비린네가 날 때 우리 동방의 의사(義士)들은 아주 슬퍼하였는데 예를들면 김시온이나 채득기 같은 분들은 모두가 백이숙제와 노중련의 마음을 품고 울분을 달래면 한 세상을 마쳤다. 이 네 분들도 또한 서로 명리(名利)를 끊고 초야에 은거하면서 진(秦)나라를 황제로 삼지 않는 마음을, 마음에 우뚝하게 담고서 살았다. 이것은 당시 선배들이 특별히 대명사처사(大明四處士)로 칭송한 것이니 그 대절(大節)의 우뚝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에 선생의 사당에 함께 모신 것이다.

 강씨를 말하면 계속해서 문학과 행의(行誼)에 힘을 쏟아서 명교 안에서 즐거운 땅이 있다는 그 말에 부합됨을 얻은 것이니 실로 대대로 덕을 이은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선생과 와운 공은 이미 연악서원에 모셔 놓았기 때문에 중복된 면이 있는 것 아닌가’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사림이 존경하여 받드는 것이 이와 같으니 자손들은 더 더욱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일의 형편이 비록 다르다고는 하지만 세덕사에 함께 배향하는 것은 마땅하니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사당은 현 임금 임술년에 세워졌고 그때의 제사지내는 축문은 구당 조호연이 지었다고 한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그 의렬(義烈)이 있는 당에 와서 보고는 당에다가 손수‘사열사려(四烈士閭)’라는 네 글자를 써서 문미(門楣)에다가 걸어, 이때부터 당세의 사대부 가운데 이곳으로 유람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사열사(四烈士)’로 칭송하였고, 통례(通禮)인 이원규(李元圭)도 ‘일문사처사(一門四處士)’로 추허(推許)하였으며, 유림에서는 대명사처사(大明四處士)로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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