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숫가루 한사발 하실래예고 순 덕 매미소리 요란한 한 여름. 장날이던 아니던 시내를 자주 나가시는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낮차를 타고 귀가를 하신다. 그리고 열흘이 하루같이 밖에서 돌아오실 때면 “너머이는?” 마루에 엎드려 방학숙제를 하다 잠이든 난 화들짝 놀라 깨어 “엄마! 뒷골 밭에요.” 대답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아버진 늘 집에 들어오면 엄마부터 찾으셨고, 다음은 샘으로 가 윗옷을 벗어 샘가 나뭇가지에 걸치셨다. “어허이 덥다. 얼릉 와 물 한바가지 퍼 부 봐라!”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마당을 가로질러 샘으로 가 두레
알아리 알. 알이야기고 순 덕 “꼬끼오~~~!!!” 날이 밝아 옵니다. “꼬꼬댁 꼬꼬꼬.” 알을 낳았습니다. 눈도 없는 꼬꼬닭, 입도 없는 꼬꼬닭. 가마솥에 막 밥을 안친 엄마는 닭장에 들어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달걀을 알자리에서 꺼내어 온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젓가락 한짝을 들고 안방으로 든다. 아버진 헛기침을 하며 받아든 달걀의 뭉뚱한 부분에 먼저 젓가락이나 송곳이로 구멍을 내고, 검지손가락으로 막아 돌려 잡고는 다시 뾰족한 부분에 조금 더 크게 구멍을 내고는 한입에 쪼옥 빈 껍질만 남는다. 집에서 소와 오빠들 담으로 귀한 첫
시집가는 날고 순 덕 지난 주말 질녀가 결혼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작은오빠의 큰 딸이. 나와 생일이 같고,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아이가 어른이 되는 날! 가족, 친지는 물론 양가 혼주의 지인과 신랑, 신부의 벗들까지 예식장이 북적였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은 옛 생각들로 북적였다. 큰언니가 시집가던 날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마당에 와 적을 굽고, 손에는 달걀이며, 쌀, 콩, 그리고 현금을 몇 백원씩 가져오는 분도 계셨다. 엄마는 정지(부엌)와 샘, 마당을 바쁘게 오갔고
떡살구고 순 덕 “작은오빠야 살구 따조.” “살구가 어데 있는데?” “저개. 저.” “아직 안익었으낀데.” “누런데 뭐. 따조 오빠야. 먹고시퍼.” 반백이 넘은 동생이 조르는 통에 머리가 허연 작은오빠는 살구나무 밑을 기웃 거린다. 한 달 전 가족모임이 있던 날, 부모님의 산소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나오다 먼 친척 오빠뻘 되는 댁 앞에 선 살구나무를 발견하고 옛 생각에 작은오빠를 졸랐다. 예전 우리집 앞에는 살구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어른들 말씀이 떡살구라 해서 종가집 화정이네 살구나무보다 나무는 작았지만, 살구 씨알은 우리 것이
먹고 싶다 복숭아!!!고 순 덕 “이눔들, 거 누기로?!” 복숭아밭 주인아재의 목청이 복숭아밭을 흔들고, 복숭아나무에 복숭아처럼 매달린 우린 그대로 떨어져 줄행랑을 쳤다. 몇 살 때였을까?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반공일. 마을 언니와 친구 대여섯이 모여 놀다가 배도 고프고,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데 생각이 머물렀다. 복숭아가 먹고 싶으면 복숭아를 먹어야지. 당시 마을에서 가장 먼 들인 사옥 우리 밭을 중심으로 좌, 우측 언덕에 복숭아밭이 있었다. 하나는 미훈(명훈→밍훈→미훈)아재네 밭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친한 친구
5일간의 기적고 순 덕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로 시작해서 “이 연사 힘~차게, 힘~~차게 외칩니다~~!”로 끝나던 웅변. 가끔씩은 목청을 죽여 감정을 살리고, 성대모사를 하며 울먹이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창시절 호국보훈의 달 6월이면 언제나 반공 글짓기 대회나 포스터 그리기, 그리고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다. 여름의 초입에 있는 6월의 해는 뜨겁기만 했다. 초. 중학교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들고 나온 의자를 줄지어 놓고, 빛 가리개 하나 없이 그대로 뙤약볕에 노출된 채로 앉
밥상을 뒤엎은 하늘집게고 순 덕 며칠 전 일하는 곳 처마 밑으로 묘하게 생긴 생물체 하나가 잠입했다. 가까이 가자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세우고 앞발을 들어 위엄을 보인다. 갑옷색깔도 묘하고, 눈인 듯한 곳에는 묘한 위장화장까지 했다. 녀석은 퇴근시각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부근을 배회하고 있더니, 휴일을 지나고 와도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날과는 달리 가까이 가도, 만져도 귀찮다는 듯 몸을 돌릴 뿐 나를 위협하려 들진 않았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무얼 어떻게 해 줘야할지? 지인들에게
사랑(?)의 매고 순 덕 한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채벌에 관해 가다 부다 말들이 많아서, 요즘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인 듯하다. 그러나 내가 자랄 때엔 맞으면서 큰다는 말이 있을 만큼 선생님의 채벌에 관해서 감히 토를 달수가 없었다. 숙제를 않거나, 준비물을 빠트려서, 공부시간에 떠들거나, 친구와 싸워서, 또는 시험 점수가 낮아서 우리는 벌을 받거나 매를 맞았다. 선생님에 따라 벌의 형태도 매의 파워도 각기 달랐는데 교실 뒤나 복도에서 꾸러 앉아 손들기를 기본으로 의자들고 손
똥고집고 순 덕 “언니 고집도 참 만만찮아여!” 손아래 시누의 나에 대한 못마땅한 평이다. ‘내가 뭐가 고집이 세다고.’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사실 간간이 주위사람들에게 고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한다. 난 그 때마다 그 말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친구들과 우연히 관상을 보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 역시 “고집만 없으면 차암 좋은데.....” 한다. 그 말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저 고집 없어요. 진짠데.....” 옆에 있던 친구들이 다 한마디씩 한다. “아이라 너 고집 씨여.” “자 고집도 알아조야 되여 마자.
빨간약의 기적고 순 덕 머큐로크롬. 일명 빨간약. 아까찡끼는 어릴 적 모든 것을 낫게 하는 유일한 약이었다. 어릴 적 나는 왜 그리도 잘 넘어지고, 무릎이 까졌는지? 그러면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위해지는 것은 빨간약 처방이었다. 그러잖아도 흙과 모레에 쓸려 상처가난 자리엔 벌겋게 피가 맺히거나 흘렀는데, 상처부위를 대충 닦아내고는 그 위에 어쩌면 피보다 더 붉은 아까찡끼를 바르면 따갑고 쓰라렸다. 그러면 온통 벌게진 무릎을 보면 넘어졌을 때 보다 더 커진 상처에 놀라고, 아픈 설움이 밀려들어 울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지금 알고보면 아
골목에서...고 순 덕 앉은뱅이 집귀신이 지난 주말엔 지인과 가까운 명소를 찾기 위해 나섰다. 여러 날 하늘을 가득매운 비구름이 다 어디로 갔는지, 눈부신 하늘엔 스치는 듯 흰 구름만 멀리서 듬성듬성 바람의 가는 길을 알려 준다. 깨끗이 세수한 산과 들은 초록이 짙어지고 찔레꽃 흐드러진 향은 가쁜 숨도 쉴 수 있게 발걸음이 멈춰진다. 목적지는 상주시 천봉산자락에 있는 영암각. 상주시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채화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큰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는 곳으로 기도발이 잘 듣는다 하여 아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빌고 싶어 찾았
우리집 모내기 날은 언제나 일요일고 순 덕 주말에 내린 비와 쓰레질로 들판의 빈 논바닥엔 흐려진 흙탕물이 그득하다. 이맘때면 아카시 하얀 꽃잎이 실바람에 춤을 추고, 잘 자란 어린모들은 무논에 발을 담군다. 이젠 허리 굽혀 손모를 심지는 않지만, 못 줄 넘기는 아버지의 외침과 어머니의 들밥 함지박속 넉넉함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보기 드문 아련한 추억이 된 때문일 게다. 착착착 이앙기 어린모의 엉덩이를 치켜들었다가 내리 꽂아 군기를 잡으면, 어린모들은 갓 훈련소를 퇴소한 이병들처럼 꼿꼿이 제 자리에 차렷! 아무리 넓은
사랑의 콩깍지 벗어지던 날고 순 덕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 하늘 한 번 쳐다보고,또 한 모금 입에 물고 / 구름 한 번 쳐다보고.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봄 하면 떠오르는 두 편의 동시 속에 나오는 작고 앙증맞은 닭과 병아리는 나로 하여금 모성애를 느끼게 한다. 21일 동안 끼니 걸러 가며 꼼짝도 않고 알을 품어 부화시킨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는 어미닭. 한동안은 잠을 잘 때도 다시 품안에 병아리들을 다 끌어안는다. 동시에 쓰여 진 그대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모가지를 길게 하늘로
새가 죽었다.고 순 덕 새가 죽었다. 맑은 유리를 감지하지 못하고 날다가 부딪혀 죽었나보다. 가엾었지만 무서운 생각에 직장동료에게 묻어주길 부탁했다. 그런데 오늘 나무 밑에서 그 새인 것 같은 주검을 보았다. 잠시 많은 생각이 오가고, 결국 어릴 적 동생과 봄이면 한 두 번씩 치루던 의식을 시작했다. 새의 장례식. 무서웠지만 새의 주검을 보이지 않게 묻어주고, 나뭇가지를 엮어 십자가를 만들어 꽂아 주었다. 둘레에 꽂잔디도 심어주고..... 예전 우리 집 처마엔 무허가 세를 사는 녀석들이 있었다. 봄이면 멋진 연미복으로 단장하고 날아
비오는 날엔 적고 순 덕 종일 촉촉이 내리는 봄비가 한껏 올라간 기온도 함께 끌어 내렸다. 춥다는 표현이 조금 머슥하지만, 얇은 스웨터 안으로 스며드는 비바람이 차갑다. 이런 날은 자글자글 빗소리와 비슷한 튀김요리나 전이 최고다. 구미당기는 소리와 따뜻함!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돌고 스르르 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오늘 같은 봄날엔 부추전이 딱이다. 가루는 조금만 넣고, 기름은 넉넉히 그리고 얄팍하니 지저 낸 전 한 장이면 비오는 날 중첩된 월요병은 쉽게 날려 버릴 수 있다. 내 사는 곳에서는 전, 부침개를 적, 또는 적쪼
후남이의 삶을 산 귀남언니고 순 덕 추억의 드라마 “아들과 딸”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인 귀남이와 후남이. 그리고 아들 귀남이가 귀한만큼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후남이를 기억하십니까? 나와 여덟살 차이, 작은언니의 이름이 ‘귀남’이다. 귀한 아들이어서 귀남이가 아니라 귀한 아들 동생을 보라는 의미의 귀남이! 그래서인지 언니 아래엔 듬직한 아들, 작은 오빠가 태어났다. 제일 예쁘다는 셋째 딸로 태어났지만 육남매의 둘째딸로 자라야 했던 작은언니는 후남이 인생을 살았다. 덩치가 작아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를
고향의 봄 고 순 덕 “이랴~ 이랴~ 어더디! 어더어더 어더디! ........ 워어 워.” 아버지는 농사 전 논의 한귀퉁이에 물을 대고 쓰레질을 한다. 겨우내 쉬었던 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의 구령에 맞춰 울퉁불퉁 질퍽한 논바닥을 보드랍고 평평하게 쓸고 지난다. 한 해의 논농사를 위한 못자리 터를 다듬기 위해서다. 쓰레질이 끝나면 소는 논머리 버드나무에 매어 한숨을 돌리지만 아버진 쉬지 않고 삽질을 한다. 풀이 나기 시작하고, 겨우내 얼었다가 녹아 부푼 논둑을 깍고, 다시 논흙을 떠서 논둑으로 끌어올려 물을 바르고 삽으로
필통. 필~~통!!!고 순 덕 달그락달그락 책보자기 안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빈도시락에 숟가락 부딪는 도시락 소리뿐만이 아니다. 나의 등에 매달려 학교 다니던 책가방 안에는 매일의 시간표에 맞는 김치국물 머금은 교과서와 과목별 공책, 도시락, 그리고 필통. 오늘은 필통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기억에 남는 나의 필통은 연두색에 뚜껑 가운데 다보탑이 새겨져 있었고, 아버지가 장에서 사다 주었기에 당시에 다른 친구들 것보다는 좀 괜찮은 디자인 이었다. 필통 안에 연필을 고정하는 칸이 없어 연필과 지우개, 칼이 뒤죽박죽 달그락거리는 저렴한
보고 싶다 친구야!!!고 순 덕 갑작스레 때 아닌 눈도 쏟아지고, 바람도 세차더니 이젠 겨울도 별 도리 없는지 완연한 봄기운에 목련이 날개짓을 시작한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아래 만개한 하얀 목련은 내 눈엔 잘 접어진 종이학이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리고 초딩시절 촌아이답지 않게 유난히 동그랗고 큰 눈, 뽀얀 얼굴을 가졌던 단짝 금희의 얼굴이 생각난다. 금희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 때까지 같은 반을 했고, ‘푸른하늘 은~은~하수 하~얀 족배~에~~......’ 노래에 손벽을 마주치며 놀 때 나와 가장 잘 맞고, 힘차던
반장선거고 순 덕 국민학생 시절 가장 가슴 뛰던 순간은 100M 달리기 출발점에 섰을 때, 6학년 불주사 맞으려고 줄 서 있을 때, 그리고 부반장선거 투표함 개표의 시간 이었다. 나는 50평생 반장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내가 무능했던 탓도 있겠지만 시대를 잘 못 타고난 탓이라 미루고 싶다. 국민학생 시절이나 중학시절 당시엔 반장은 무조건 남자, 부반장은 남·녀 각1명씩으로 하는 규칙이 있었다. 여학생인 난 반장에 입후보 할 수조차 없었고, 반장보다 많은 지지를 얻었어도 반장이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당돌하게 담임선